ㅍㅍㅅㅅ https://www.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Mon, 30 Mar 2020 05:32:00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1 https://www.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www.ppss.kr 32 32 N번방, ‘단순 수요자에 대한 조치’가 핵심인 이유 https://www.ppss.kr/archives/215323 Mon, 30 Mar 2020 05:17:39 +0000 http://3.36.87.144/?p=215323 1.

지난 토요일 n번방, 그리고 박사방 사건을 다룬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언급되었던 부분이지만, 이 사건은 설사 박사에게 무기징역에 구형되거나 선고되고 갓갓도 체포되어 똑같이 신상공개를 당하고 중형에 처해지더라도 다시 다른 형태로 진화해서 발생할 것이다. 더 음지화 되고 더 교묘해진 형태로.

그건 결국 익히 모든 이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수요자들의 존재 때문이다. 소라넷 100만명이 곧 n번방과 박사방의 수요자가 된 것이다. 소라넷이 av스눕이 되고, av스눕이 다시 텔레그램 성범죄가 된 것이다. 단계가 거듭될 때마다 조금씩 숫자는 줄어들지 몰라도 수요 집단이 존재하는 한 계속 나올 것이다. 소수화되고 음성화 된 만큼 범죄의 형태는 더 지독해지고 더 과감해질 것이며, 다른 범죄와 연계되어 더 강력해질 것이다. 이번 조주빈만 하더라도 일련의 행위들이 지향하는 지점을 보면 종국에는 더 강력한 스너프 필름을 제작하려 들었을 가능성도 높다.

 

2.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결국 필요한 것은 ‘수요자에 대한 조치’이다. 그게 어떤 형태가 되든 상관없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면 수요자들 역시도 영향을 받게 된다 정도의 시그널만 줘도 그 이전과 이후는 명확하게 나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많은 불법 성인 콘텐츠 시장의 수요가 유지되는 가장 강력한 이유가 바로 ‘업로더가 아닌 단순 이용자는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혹은 ‘단순 이용자는 소환 조사의 대상 조차 아니다’라는 광범위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조주빈 사건이 이렇게 온 국민에게 회자되는 현 상황에서 조차 ‘단순 딸쟁이는 괜찮아’라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얘기되고 있는 현실이다.

비슷한 내용의 게시물이 지식인, 커뮤니티 등을 망라하여 올라오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어떤 방식이 되든 저런 인식에 균열을 가할 필요가 있다. 사건이 벌어지면 단순 이용자들도 소환 조사를 당하고 그 과정에서 망신을 당할 수도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시그널을 확실하게 줘야 한다. 저들의 표현대로라면 ‘그게 불법 사이트라면, 딸 한번 잡았다가 동네방네 개망신당하고 앞길까지 망가지는’ 상황을 만들어야 불법 콘텐츠 시장에 대한 수요를 최대한 줄이고 차단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의 핵심은 조주빈 및 그 공범 일당에 대한 처벌이 아니다. 그쪽은 현행법 위반인 만큼 체포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처벌을 받게 되어 있다. (물론 이들에 대한 과감한 양형 기준 적용을 통한 강력한 처벌 역시 중요하다) 요는 단순 이용자들을 포함한 이용자들이 어떻게 처리되느냐이다.

특히, 고액의 이용료까지 내가며 이들이 만든 콘텐츠들을 소비하려 들었던 유료 이용자들에 대해서는 교사범 수준의 혐의를 적용하여야 한다. 그래야 성범죄로 만들어진 불법 콘텐츠들을 유통하여 유지되는 수많은 불법 성인물 플랫폼에 지갑을 열고 그를 통해 그들을 유지시켜 주고 있는 수많은 수요자들의 지갑을 닫게 만들고 또 다른 후속 사건들의 발생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수요자 역시도 공범이며,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다.

이들을 처벌할 법적 근거에 대해서도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출처: JTBC

 

3.

저들이 얘기하는, 단순 이용만 했을 뿐인 ‘선의의 피해자’들이야말로 소라넷과 av스눕과 n번방과 박사방을 존재하게 만든 가장 강력한 스폰서들이다. 이들에 대한 처리가 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주범과 공범들에 대한 처벌 강도가 아무리 강력한들 후속 사건을 계획하며 저 수요를 노리는 이들에게는 그저 ‘재수 없이 잡힌 케이스’에 불과할 뿐이다. 범죄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 처벌은 의미가 없다.

범죄자는 수요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나온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범죄 소탕 전략은 바로 돈줄을 끊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대놓고 저들의 불법 성범죄 영상물 제작을 후원한 유료 이용자들뿐만 아니라 저 ‘단순 이용자’들 까지도 어떻게 처리되느냐가 정말 중요한 이유이자, 그 부분이 이번 사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어야 할 이유다.

원문: 손원근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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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만의 국면 전환, 6·30 회담 배경에는 한국 정부의 ‘인내력’이 있다 https://www.ppss.kr/archives/198718 Wed, 03 Jul 2019 05:09:26 +0000 http://3.36.87.144/?p=198718 공동 합의문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말 그대로 ‘파토’가 났던 2차 정상회담 이후 불과 4개월 만에 성사된 회담이다. 이는 8개월 만에 열렸던 1~2차 간의 기간보다 절반이나 짧다. 2차 회담의 공동 합의 결렬 이후 뾰족한 전환책이 나오지 않아서 자칫하면 장기 교착 국면으로 전환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4개월 만에 다시 ‘분기점’이 만들어졌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는 일각의 비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회담의 성사 자체가 가장 큰 성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장소는 1–2차 정상회담 보다 한결 더 상징적인 (이보다 더 상징적일 수 없는) 곳이다. 사진만 찍고 헤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만도 충분한 성과라 할만한데 회담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이상의 ‘성과’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불과 2년여 전만 하더라도 전쟁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던 양자가, 이제 ‘만나자’고 하면 만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1차 회담 이후 여기까지 이어진 여정 자체가 종전이라는 최종 목적지로 가기 위한 하나하나의 중요한 분기점 들이다.

출처: 청와대

단지 상징적인 부분들만 성과는 아니다. 이런 즉흥적(으로 보이는) 회담조차도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물 밑에서 실무자 간 협의와 조율이 필요하다. 비록 양 정상은 이 회담이 즉흥적 제의에 의한 결과라고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최소 2~3주 이상, 즉 G20 회담 이전부터 조율이 있었을 것이다. 그 얘기는 2차 회담 이후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던 실무자 간 협의 채널이 재가동 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짧은 시간 안에 이런 역사적 장소에서의 회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것은, 양국의 실무자 간 채널이 거의 상시 가동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불과 1년 만에 만들어낸 변화들이다. 이 자체가 모두 ‘성과’이자 최종 목적지로 가기 위한 중요한 필수 통과 지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 있어서 ‘한국 정부가 한 게 뭐 있냐’는 비판에 대해서도 조금 얘기해 보고 싶다. 지금은 비공개로 돌려진 듯싶지만, 모 언론사 부사장께서 어제 올린 ‘문재인 인내력’이라는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도 취임할 때는 한반도 정책, 대북정책에서 유연한 태도를 취하고 나름 획기적 구상을 했었다. 그러나 북한이 테스트 차원에서 던지는 비난에 발끈하고, 돌발사건 하나만 터지면 곧바로 봉쇄노선으로 회귀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못하고, 그냥 세월만 갔고, 그 기간 북한 핵은 더욱 개발되고 고도화했다.

백 배나 규모가 큰 집이 헐벗고 자존심만 센 작은 집을 대할 땐 인내와 관용이 필요하다. 서로 교류하고 오가면 큰 집은 결국 작은 집을 접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땡깡도 놓고 예측불허의 행동도 하겠지만, 그건 초조감과 열등의식일 뿐이다. 우리가 똑같이 화낼 필요가 없다. 훗날 문재인 대통령의 인내력은 역사적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얼마 전 북한의 돌변한 태도에 대해서 ‘역시 북한은 저런 집단이라는 게 다시 한번 입증된 만큼 저렇게 나올 때는 유화 분위기를 접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주변국들과 함께 한국 정부가 앞장 서서 강력한 대북 압박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들이 올라온 적이 있다. 만약 그때 한국 정부가 예전처럼, 그리고 저 의견들처럼 대북 유화 제스처를 접고 우리 정부가 강경 대응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혹자는 그런 상황이 되더라도 한국 정부는 어차피 이 국면에서 ‘패싱’ 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와 상관없이 북미는 화해 무드를 이어갔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동맹국인 한국 정부가 강경하게 나오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동의하지 않은 DMZ에서의 회동 같은 이벤트가 과연 가능할까?

회동은 물론이거니와 지난 1–2차 회담에서부터 6·30의 역사적 3차 회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비에서 예전과 같은 교착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비를 넘게 만든 배경에는 분명히 저 한국 정부의 ‘인내력’이 자리 잡은 것이다. 저 수없이 많은 예측 불허의 돌발적 상황과 주변국들에 의한 외교적 변수에도 한국 정부가 과거 정권의 해묵은 방정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운 해법으로 북미 관계를 물밑에서 조율하고 설득하며 풀어나간 것이야말로 바로 오늘의 또 한번의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 낸 원동력인 것이다.

1차 북미정상 회담이 성사된 지 불과 1년이다. 과거에 시선을 두지 않고 미래를 향한 시선을 가진 이들이 피땀 흘리며 노력한 이 1년 동안의 결과물이 판문점에 모였다.

 

1. 따지고 보면, 트럼프가 종종 얘기하는 ‘그래서 옛날처럼 해서 그동안 변한게 있었냐’는 민주당을 향한 비난도 어떻게 보면 저 ‘인내력’에 대한 얘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따지면 어쨌든 격식과 상식에 얽메이지 않는 트럼프의 스타일이 분명히 한반도 상황의 변화에 영향을 주는 것 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문제는 이런 파격은 어디까지나 트럼프 재임 기간 동안에만 유효한 것이고 그 이후에는 오히려 기존 동맹국 간의 외교 문법에서 벗어났던 저런 방식이 부메랑이 되어 역효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만큼 이 트럼프의 재임 기간 동안 ‘북핵 문제의 해결과 더불어 북한의 불가역적인 개혁과 개방을 끌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난 그 부분을 정확하게 얘기해 온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이 바로 저 ‘인내’의 원천이라고 본다.

2. 혹자는 이 모든 것들이 재선을 위한 트럼프의 쇼일 뿐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앞서 얘기한 것처럼 그 ‘쇼’를 위해서는 실무자들 간의 채널이 재가동 되고, 협의가 이어지며, 그 과정에서 교착 상태를 무너뜨리는 분기점이 형성된다. 다음번 시작은 2차 회담이 아닌 이 3차 회담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트럼프에게는 ‘쇼’라도 상관없다는 얘기다. 개인적으로는, 그간의 결과를 보면 한국 정부가 이런 트럼프의 성향을 잘 활용한다고도 보인다.

3. 한국 땅에서의 회담인데도 한국 정부가 전면으로 나서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도 보이는데, 남북 문제와 북미 문제는 별개이며 북미 문제는 오롯하게 양국 간의 문제(이른바 통미봉남)라는 기조를 유지해 온 북한 지도부의 입장은 물론이거니와, 언제나 쇼잉의 중심이 되길 원하며 이런 쇼잉 하나하나를 재선을 위한 중요한 이벤트로 보는 트럼프의 입장에서도 이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게 좋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한국 정부가 전면에 나설 경우 한반도 문제에 있어 자신들의 역할 역시도 중요하다고 여기는 러시아나 중국, 일본 같은 주변국들의 거센 외교적 압력과 간섭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랬다면 북미 양자간의 회담은 그 성사 자체가 어려웠을 수도 있었다. 이런 어려운 조건에서의 회담이 3차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는 이 회담을 당사자 양국만의 문제로 국한하는 한국 정부의 적당한 존재감 조율도 큰 몫을 한다.

원문: 손원근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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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법정구속, 재판부의 판결 근거에 정당성이 있는가? https://www.ppss.kr/archives/186391 Fri, 01 Feb 2019 01:42:00 +0000 http://3.36.87.144/?p=186391
지난해 5월 16일 2회 공판에 출석하는 드루킹 / 출처: 뉴스1

현행법상 선거와 관련한 여론조작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하나다. 뭐냐 하면, 선거 운동원으로 등록된 자가 아닌 이가 인터넷상에서 여론조작을 목적으로 조직적인 행위를 실행한 경우이다. 이 경우 공직선거법 제89조 ‘선거 사무소의 유사기관 설치 금지 규정의 위반’에 의해 해당 당사자와 조직원은 처벌받을 수 있다. 그래서 드루킹은 당연히 유죄다.

이때 매크로 프로그램의 사용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현행법에서 매크로 프로그램의 사용 여부는 선거법 위반의 요소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 드루킹 및 김경수 지사 판결에서도 매크로 프로그램 사용 여부는 선거법이 아니라 업무 방해 쪽에 맞춰졌다. 즉 선거법과 관련해서라면 사람을 쓰든 매크로를 쓰든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중요한 건 선거 운동원으로 등록되지 아니한 자가 선거를 위한 여론 조작을 위해 조직적 행위를 했냐 아니냐 뿐이다.

혹자는 여론 조작 자체를 가지고 문제 삼는데, 우리 선거법에서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가 문제가 되는 건 저 케이스뿐이다. 여론 조작, 즉 폭넓게 얘기해서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여론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 자체는 불법의 영역이 아니다.

가령 선거에서의 유리한 국면 조성을 위해 조직적으로 인터넷에서 댓글을 달고 활동하는 것을 선거에 출마한 이가 자신의 선거운동원을 통해 실행하면 그게 허위사실 유포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은 처벌할 근거가 없다. 그게 문제가 되면 선거운동 자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요는, ‘여론에 영향을 주려 했는가’가 아니라 ‘불법적으로 조직한 조직으로 시도하였냐’다.

이제 이걸 염두에 두고 김경수 지사 건을 보자. 드루킹이 아닌, 김경수 지사에게까지 저 죄목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김경수 지사가 저 민간인 조직의 조직을 지시하고 실질적으로 운용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다시 얘기하지만 킹크랩, 즉 매크로 프로그램의 사용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1월 30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선고 공판에 출석하는 김경수 지사 / 출처: 연합뉴스

킹크랩을 썼든 사람이 직접 댓글을 달았든 선거법에서 중요한 부분은 저 불법 조직을 직접 운용하거나 지원하였느냐의 여부뿐이다. 따라서 이때 조직의 구성과 운용을 지시한 구체적인 문서가 남아 있거나 그 조직의 구성과 운용을 위한 자금을 직접 대주었다면 당연히 그 부분이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특검의 조사 결과 그런 지시를 내린 구체적인 문서 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금? 이건 특검조차 부인했다. 특검은 드루킹 조직의 운용에 정치 자금이 들어갔다는 부분에 대해서 실제 드루킹의 경공모가 비누 등을 판매해 얻은 수익과 운용 자금의 규모가 거의 일치하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혐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검 측이 내세운 근거가 바로 텔레그램 메시지인데, 특검 측은 그게 실질적인 조직 운용을 위한 지시의 명확한 근거가 되는지 여부를 입증하지 못했다. 즉 판결을 위한 관점에서 본다면 그게 어떤 성격의 메시지인지 확인이 안 되었다는 얘기다. 여기서 그걸 ‘지시’로 볼 수 있는 근거는 피의자 드루킹의 진술뿐이다.

업무방해 여부? 더 폭넓게 적용 가능한 선거법에서조차 유죄를 인정할만한 근거가 도출되지 않는데 업무방해를 직접적으로 지시했다는 근거가 나올 수가 있나? 결국 남는 건 이 판결의 결과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인 피의자의 오락가락하는 진술뿐이다. 그래서 재판부도 모조리 그 ‘진술’이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 각 개별 사건의 연관성을 판단해 판결했다.

그런데 이미 그 전제가 선의에 의한 가정뿐인 상황에서 이게 어떻게 정상적인 판결이 되겠나. 게다가 법원은 그런 상황에서 판결로도 모자라 현역 지자체장의 경우 확정판결이 아닌 이상 법정구속을 면한 선례가 있음에도 법정구속까지 내렸다.

공판 이후 호송차에 탐승하는 김경수 지사 / 출처: 경향신문

비록 법률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에 불과하지만 솔직히 재판부의 판결 근거 자체가 ‘진실이라고 가정’한 상태에서 그에 근거한 판결인데 여기에 어떤 법리가 더 적용되어 저 판결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으로서는 그런 법리 대신 삼권분립의 대명제 하에 견제받지 않는 성역으로 남아 있었던 사법부가 어떻게 스스로 권력이 되어 그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지만 보일 뿐이다. 개탄스러운 일이다.

원문: 손원근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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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vs. 카타르전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https://www.ppss.kr/archives/186199 Thu, 31 Jan 2019 04:00:56 +0000 http://3.36.87.144/?p=186199 수비수들을 끌고 다니면서 공간을 열어줘야 할 에이스는 내려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고 빌드업은 실종되었으며 게임을 풀어나가야 할 선수는 고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패스를 받기 위한 움직임도 거의 없다 보니 볼을 가진 선수들은 고립되기 일쑤였다.

돌파하는 선수들 주변으로 다른 선수들이 파고들며 공간을 견제해 주지 않다 보니 상대 수비수들은 손쉽게 우리 공격수에 대해 수적 우위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돌파로 균열을 만들 수 있는 선수마저 빠져 있다 보니 공격 루트도 단조로워졌고 체력 부담을 가진 수비수들은 종종 실수를 연발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고개 숙인 손흥민 / 출처: 연합뉴스

가장 큰 문제는 에이스 손흥민의 존재감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지난 중국전에서 대표팀의 경기력이 살아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뭐니 뭐니 해도 손흥민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손흥민이 최소 2~3명의 수비수를 끌고 다니면서 상대 진영 깊숙한 곳에서 움직이는 바람에 깊숙이 내려앉아 있던 상대의 수비수들은 포지션을 유지할 수가 없었고, 그 균열이 생긴 틈 사이로 우리 선수들이 움직이며 많은 공격 찬스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빌드업을 담당할 수 있는 기성용의 대체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측면 높은 곳에서 플레이하는 이청용이 플레이 메이커처럼 움직이며 빌드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계적인 선수를 보유한 팀이 내려앉아서 수비하는 팀을 상대로 공격의 물길을 낼 방법이다.

그런데 이번 카타르 전에서는 손흥민의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평소 본인이 위치하던 상대의 하프 스페이스보다도 훨씬 더 내려앉은 자리에 위치한 공격수는 그게 아무리 세계적인 선수라 하더라도 상대방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선수가 돌파할 때 하프 스페이스를 노리고 들어가며 상대 수비를 견제해 줘야 할 때조차도 손흥민의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컨디션 난조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보통 그런 포지셔닝은 라인 브레이킹을 하기 위한 포지셔닝인데 라인 브레이킹은 우리보다 강한 팀을 상대로 할 때, 그래서 그 팀의 수비 라인이 끌어 올려졌을 때나 가능한 얘기지 이번 대회에서처럼 대부분 팀이 잔뜩 움츠리고 수비 라인을 내렸을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손흥민의 움직임이 없다 보니 손흥민이 위치한 왼쪽 라인의 파괴력도 무뎌졌다. 김진수는 활발하게 움직였지만 쉽게 고립되었다. 돌파하더라도 패스를 받아줄 선수가 없었고, 수비를 견제해 주지 않다 보니 종종 2명 이상의 수비수에 둘러싸여 급한 크로스를 올리거나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왼쪽의 공격이 무뎌지자 이청용-이용의 오른쪽 라인으로 공격이 집중되었고, 그만큼 공격 루트는 더 단조로워졌으며, 이청용에 대한 견제도 집중되면서 중국전에서와 같은 플레이 메이킹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부상으로 카타르전에 부재한 황희찬 / 출처: 데일리안

이럴 때 닥돌을 하며 상대 수비 라인의 균열을 유도할 황희찬의 부재도 아쉬웠다. 마무리가 좋지 않고 실수가 잦아서 많은 팬들의 원성을 사고 있지만, 수비 라인을 잔뜩 내린 상태로 좁은 공간에 몰린 약체팀을 상대할 때 황희찬 같은 닥돌형 선수들의 가치는 생각보다 크다. 특히 지난 경기처럼 우리 선수들이 많이 움직여 주지 않을 때 황희찬 같은 선수의 닥돌은 공간을 여는 기폭제가 된다. 하지만 그 황희찬마저 부상으로 이탈했고, 그 역할을 할 다른 존재인 이승우의 투입은 경기가 기울어진 뒤에 이뤄졌다.

황인범은 탈압박 능력이 좋고 전진 패스가 뛰어난 선수지만 몸싸움에 능한 타입은 아니며 개인 전술로 공간을 창조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기성용처럼 빌드업이 가능한 선수가 뒤를 받쳐줄 때라면 몰라도 그게 아닐 때에는 수비형 미드필더의 보호를 받아야 게임 메이킹이 가능한 스타일이다. 그래서 벤투 감독도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배치했는데, 주세종과 정우영이 바로 그 역할의 담당자들이었다.

하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들의 움직임은 부족했거나(정우영) 자신의 롤을 망각한 채 엉뚱한 곳에서 이뤄졌으며(주세종) 그 결과로 황인범은 상대 미드필더들과 수비수들의 거친 압박에 종종 고립되어 기량을 펼치지 못했다. 그리고, 기성용이 사라진 경기장에서 높은 빌드업을 담당했어야 할 황인범의 이런 고립은 게임을 풀어나갈 선수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종 나타났던 선수들의 실수는 체력 관리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트래핑 실수와 같은 기초적인 실수는 물론이고, 경기 중 자주 보였던 성급한 태클과 몸 날리기와 같은 큰 동작은 상대 선수를 꾸준히 따라갈 체력에 부담이 있을 때 보이는 현상들이다. 비록 전 경기에서 연장전까지 치루는 부담이 있긴 했지만 상대는 피파랭킹이 북한보다 낮은 바레인이었다. 토너먼트를 진행하면서 1~2번의 연장전은 각오하는 게 정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표팀의 체력 프로그램을 점검해 봐야 할 필요가 있는 지점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처럼 투입된 선수들이 체력적 부담을 크게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되는 기량의 팀을 만났을 때, 딱 지난 경기와 같은 양상이 연출된다. 상대의 기량이 높지 않다 보니 긴장감이 떨어지고, 그 상황에서 체력적 부담이 있다 보니 볼을 가진 선수가 혼자서 해결하기를 바라거나 혹은 다른 선수가 도와주길 바라며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경기 후 파울루 벤투 감독 / 출처: 연합뉴스

감독의 전술적 선택도 아쉬웠다. 보통 전력 차가 나는 상대가 내려앉아서 자물쇠를 잠그면 전력 상 우위에 있는 강팀들은 최대한 많은 선수를 전진시켜 물리적인 기회 자체를 늘린다. 한마디로 가둬 놓고 두들기기를 시전한다는 얘기다. 물론 그렇게 최대한 많은 선수를 전진시키면 역습에 의한 카운터의 가능성도 만들어진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의 전진으로 인해 수비 라인이 극단적으로 올라가면 그만큼 역습 거리도 길어지고 전진 압박에 의한 커팅에 대한 부담으로 급한 패스로 역습이 진행되기에 성공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진다. 지난 아시안 게임에서 대부분의 팀에게 압도적인 전력 우위를 가진 대표팀을 운용했던 김학범 감독의 기본적인 전술 기조도 바로 ‘최대한 많은 선수를 전진시킨다’였다.

하지만 지난 경기에서 벤투호는 처음부터 지나치게 전형적이고 안전한 전술 시도를 했다. 비슷한 전력을 가지고 있거나 약간의 열위를 가진 팀을 상대로 할 때의 전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특히 지난 경기에서처럼 선수들이 체력적 부담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리고 그 상황에서 상대 팀이 우리 팀의 전력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전진을 요구할 필요가 있었다.

선수들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빠른 선수 교체를 통해서라도 이를 주문했어야 했다. 포워드지만 볼을 운반할 수 있고 공간을 넓게 파고드는 지동원, 닥돌을 하며 수비수들의 라인에 균열을 만드는 이승우가 들어오고 난 뒤에 공격이 다소 활력을 찾은 건 선수 교체의 효과도 있어서긴 하지만 그 지점이 카타르전 대표팀 공격력이 무기력했던 지점이라는 얘기다. 8강전의 부담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보수적인 운용이었다.

다시 하는 얘기지만,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체력적인 부담으로 인해서 상당수의 선수들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나마 움직여 주는 선수들은 동료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서 모두 개인 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타개해줄 전술적 변화도 부족했다. 에이스는 보이지 않았고, 대회 내내 팀의 발목을 잡았던 빌드업의 실종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비록 결승 골은 불운도 작용된 결과였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져도 이상할 게 없는 경기였다는 얘기다. 불운은 그럴 때 만들어진다.

경기 후 대표팀 선수들 / 출처: 연합뉴스

이번 대회에서 노출된 가장 큰 문제점은 기성용의 빈자리에 대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부터도 대표팀의 경기력은 기성용의 부재 여부와 기성용의 경기력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지만, 특히 벤투처럼 낮은 빌드업을 기반으로 경기를 펼치기 위해서는 기성용과 같은 선수의 존재가 필수다.

하지만 기성용은 이미 전성기를 지났고 그 자리를 대체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장현수는 불미스러운 일로 더 이상 대표팀에 합류할 수 없게 되었다. 황인범은 과거 구자철이 그랬던 것처럼 높은 위치에서 플레이하는 선수지 기성용처럼 스스로 볼을 간수하면서 낮은 빌드업을 하는 선수가 아니다.

기성용의 부재는 가장 기본적인 빌드업의 공백으로 이어졌고 이는 감독 부임 초반 만들어졌던 팀의 기본적인 색깔, 즉 낮은 빌드업을 기반으로 한 빠른 측면 돌파를 무너뜨렸다. 이번 대회 들어 앞선 평가전들에서와 달리 답답한 경기력을 보인 이유다.

낮은 빌드업은 세계적인 추세다. 보통은 커맨드형 수비수들이 담당하지만 한국 축구는 뛰어난 자질을 가진 선수들이 수비를 회피하는 오랜 축구 환경의 문제로 인해서 이런 빌드업을 담당해 줄 커맨드형 수비수들이 부족하다. 그런 와중에서 그 역할을 해오던 기성용이 없을 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벤투 감독의 거취와는 별개로 한국 축구가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 해결해야 할 지점이다.

원문: 손원근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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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과 연좌제: ‘혜경궁 김씨’ 논란의 계정주가 김혜경이 맞다는데 https://www.ppss.kr/archives/180328 https://www.ppss.kr/archives/180328#respond Fri, 23 Nov 2018 02:07:49 +0000 http://3.36.87.144/?p=180328
출처: 노컷뉴스

이른바 그 ‘혜경궁 김씨’ 논란의 계정의 주인이 김혜경이 맞다는 경찰의 발표가 있고 나서 일각에서는 그게 설사 맞다고 한들 그건 김혜경 본인의 문제일 뿐 정치인 이재명이 져야 할 책임이 아니라거나 혹은 정치인에게 가족의 잘못까지 책임지게 하는 건 과하다는 얘기도 나오는 듯싶다. 이에 나는 과거 남경필 아들 문제 관련 연좌제 논란 때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정치인의 가족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회 구성원으로의 심각한 결격 사유를 보였을 때 그 책임을 해당 정치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연좌제이기 때문에 부당하다’라는 논리는 사실 큰 틀에서는 맞는 얘기지만, 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좀 다르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첫째. 정치인의 가족은 그 자체가 권력 집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정치인이 거물 정치인일수록 그 정치인의 성취에 따라 가족들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소유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때 그 가족 구성원들이 훌륭한 시민 윤리를 가진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건 역사를 통해 종종 입증되어 온 바인데 하물며 저런 경우라면 어떨까. 어떤 형태로든 그 가족은 정치인의 영향력이 커짐에 비례하여 그걸 자신이 사유화한 권력의 형태로 사회에 반사회적 혹은 반민주주의의 형태로 투사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인의 가족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정치인 당사자의 책임은 일반적인 가족 구성원들의 잘못에 대해 당사자 본인이 져야 할 책임과는 구분해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는 김혜경의 잘못이 법률상의 죄는 아니라는 얘기도 하던데, 그 지적처럼 법률상의 죄목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저 때 언급한 저 이유로 충분히 그 문제가 정치인 이재명에 대한 자격 판단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더군다나 이재명이 차기 대권의 후보군 중 한 명이고, 만에 하나의 경우 논란의 인물이 영부인이 될 수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당연한 것이고.

출처: 한국경제

덧. 이재명 측에서는 그 계정이 비서실에서 공용으로 사용한 계정이라는 변명을 하나 본데 그 경우라면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게, 이재명 측에서는 그 계정이 비서실에서 운영한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 그 계정의 내용에 동조를 해왔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자연인 이재명으로서는 몰라도 정치인 이재명으로서는 그게 더욱더 치명적일 텐데?

원문: 손원근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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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확진자 검역 과정의 ‘거짓말’과 한국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 https://www.ppss.kr/archives/174659 https://www.ppss.kr/archives/174659#respond Thu, 13 Sep 2018 06:04:18 +0000 http://3.36.87.144/?p=174659 메르스 확진자 검역 과정의 거짓말
출처: 노컷뉴스

이번 메르스 확진자 검역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이슈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거짓말’이다. 환자 본인은 귀국 전 따로 처방을 받아 수액까지 맞을 정도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열’과 ‘오한’을 감지하고도 방역 당국에는 메르스의 주요 증상이라든가 대증 치료받은 부분을 빼놓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정작 부인에게는 마스크를 하고 나오라 하고 다른 차량을 이용하는 등 충분히 메르스 가능성을 인지했다. 그럼에도 사실상 고의가 의심될 정도로 보건 당국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부인 역시 남편의 메르스 가능성을 인지했음에도 따로 방역 당국에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삼성병원에 근무한다는 지인 또한 의료인으로서 충분히 메르스 가능성을 인지했으나 즉각적으로 보건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 보건 당국의 조사가 시작된 뒤 환자를 태웠던 택시의 기사는 다른 승객을 태우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 방역 당국의 초기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니 이미 한 차례 메르스로 인한 홍역을 전 국가적으로 겪었음에도 모든 단계에서 방역을 어렵게 할만한 ‘거짓말임을 자각하고 시도한’, 그러니까 고의적인 거짓말이 감지된 셈이다. 이를 두고 한국 사회의 ‘거짓말 쉽게 하는 세태’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는 여러 반응을 볼 수 있는데, 나는 사실 이게 한국인만 특별히 더 이기적이고 특별히 더 거짓말을 잘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일종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 문제에서 기인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난번 메르스 사태가 한창일 때, 공교롭게도 중동 경유 귀국행 비행기를 두 차례 정도 탄 적이 있다. 시기가 시기라서 그런지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기내 검역 설문서 작성이 있었다. 그때 기내에서 오갔던 다른 한국인 승객들의 대화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기침, 발열 이런 거 절대 체크하지 마. 귀찮아져.

증세 있어도 절대 있다고 쓰지 마.

아무것도 체크하지 말고 입국장에서 물어보면 무조건 괜찮다고 해.

공교롭게도 이번 메르스 확진 사태에서 드러난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거짓말’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는지 알면서도 ‘거짓말’을 서로 종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저 확진자와 확진자 부인과 지인, 그리고 택시 기사만의 특별한 케이스가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언뜻 봐서는 그래서 집단 이기주의, 집단 거짓말의 문제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저 이면에는 ‘제대로 해봐야 나만 손해 본다’는 생각이 깔렸다. 그러니 ‘공익을 위해 행동해 봐야 나만 손해 보는 게 한국의 시스템’이라는, 우리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깔린 것이다.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괜히 보고했다가 귀찮아지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관측되는 건 이른바 ‘저 신뢰 사회’에서 잘 보이는 현상이다. 비단 사회 전체 같은 큰 규모의 집단뿐 아니라 저러한 현상은 작은 단위의 집단에서도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만연하면 관찰되는 현상이다.

군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 잘 알 것인데, 군대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다. 흔히 얘기하는, ‘군에서는 너무 못해도, 너무 잘해도 손해 보니까 눈에 안 띄는 게 최선’이라는 얘기는 보상과 처벌이라는 점에 있어서 군의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것이다. 나는 자가 검역에 대한 저런 반응들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즉, 개개인의 도덕성 문제에 앞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의 결과라는 얘기다.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결국에는 ‘원리 원칙이 통하지 않는 사회’ 혹은 ‘정도보다는 꼼수가 더 잘 통하는 사회’에 대한 경험에서 기인하는 것일 테다. 절차나 법을 지켜봐야 내게 돌아오는 건 손해뿐이고, 오히려 그걸 지키지 않은 이들이 이익을 보는 걸 사회 집단 전체가 오랜 기간 겪으며 경험하다 보면 결국 집단 다수가 사회 시스템을 신뢰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시스템을 지켜봐야 손해인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자기 보호 본능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타인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도 거짓말하는 배경에는 저런 부분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그런 ‘경험’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나는 잘못된 정치라고 본다. 정상적이지 않은 과정을 거쳐 권력을 획득하고, 그 권력을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유지하려 하는 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권력은, 결국 절차와 시스템보다는 권력자 개인 혹은 권부 일부에 대한 맹목적 충성으로 유지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법과 절차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고, 그걸 여러 해에 걸쳐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경험하면 앞서 얘기한 것처럼 사회 시스템을 불신하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최고 권력뿐 아니라 일견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은 권력 하나조차도 모두 사유화되고, 그 사유화된 권력들은 욕망과 결합되어 시스템을 일탈해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해 쓰이는데, 그러다 보면 사회 구성원들은 결국 사회 전체에서 ‘절차와 규정보다는 이익 추구가 우선’이 되는 게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학습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불신을 원천적으로 개선하는 길은 ‘제대로 된 학습 경험’을 심어주는 것밖에 없다. 그 학습 경험은 다름 아닌 ‘우리 사회에서는 원리 원칙, 절차와 법을 지키는 이가 결국에는 덜 손해를 본다’는 경험의 공유일 것이다. ‘절차나 규정 지켜봐야 손해’라는 학습 경험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만들어 왔던 것처럼 거꾸로 ‘절차나 규정을 지키는 것이 이익’인 학습 경험이 만들어져야 사회 전체에 만연한 시스템 불신을 제거할 거라는 얘기다.

‘적폐’를 얘기할 때 흔히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권력을 사유화했던 이들에 대한 ‘인적 청산’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적폐’는 저런 ‘잘못된 사회와 그 잘못된 사회에서 비롯된 잘못된 이익 획득이 정당화되는 것에 대한 경험’이다. 그 경험이 살아 있는 한, 인간은 조금만 힘들어져도 끝없이 그 경험을 되살려 줄 수 있는 권력이 나타나는 것을 원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절차와 법을 지키는 길은 결국 사회 전체의 신뢰 비용을 감소시켜 모든 구성원의 이익이 된다. 하지만 그걸 경험해 보지 않은 사회에서는 당장의 불편함이 크고, 그래서 당장의 불이익이 크게 다가오기 때문에 ‘할 수 있게 되면’ 또 다시 적폐를 향해 욕망이 꿈틀거리게 되어 있다. 당장 내가 손해를 보는 상황이 되면 정의고 신뢰고 뭐고 간에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적폐’ 정권을 만들어 내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적폐’는 바로 저 잘못된 학습 경험이다.

‘잘못된 이익 획득이 정당화되는 것’에 대한 학습 경험이 무너지고 ‘원칙과 준법을 지키는 것이 결국에는 가장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보편화되어야 또 다른 적폐가 나타나는 것도 막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진짜 ‘적폐’가 해소되고 새로운 학습 경험이 만들어져야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한 이기주의’도 사라질 수 있게 된다. 그게 진정한 적폐청산이자 재조산하(再造山河)다.

 

결국에는 또다시 ‘정치’다

출처: KBS1

저런 잘못된 학습 경험을 가진 이들이 상당수인 사회에서 ‘원칙과 절차의 준수’란 귀찮고 손해 보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인적 청산이야 내 일이 아닌 데다가 큰 범죄 사실이 눈에 보이니 청산해야 할 적폐로 인식하고 지지할 수 있지만, 당장 엄청난 비리나 불법은 아니나 나에게는 피해가 되는 일들에 대한 ‘원칙론’은 짜증스럽고 불합리하게 여겨져서 대단히 이뤄내야 할 당위성을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사회일수록 욕망도 다양하고 층위도 깊고 넓다. 그리고 그런 사회일수록 저 ‘원칙론’은 어느 한 부분에서 모두의 욕망을 건드리고 모두의 이기심을 공격한다. 누구에게나 공평무사한 원칙을 만드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바로 잡는 과정에서는 모두의 이익을 건드리기 때문에 명과 암이 선명하지 않은 영역으로 내려갈수록 사회 구성원들의 반발도 커지기 마련이다. 그걸 깨부수지 않고서는 절대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어렵다. 이미 우리 사회는 ‘시스템을 지키지 않는 것이 더 유리한’ 시간을 학습해 왔기 때문이다.

그걸 해결하려면 정치적 유불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저 제대로 된 학습 경험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원리 원칙’ 혹은 ‘절차 준수’에 대해 거의 근본주의적인 수준의 노력이 가능한 정치가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대한 높은 감수성을 동반해야 가능하다. 결국 ‘절차와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 가장 손해를 보지 않는 일’이 된다는 것은 절차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민주주의 감수성과 연결되는 일인 동시에 그걸 통해서 개인의 사익에 앞서 사회 구성원 최대 다수의 공익을 추구함으로써 사회의 신뢰 비용을 감소시키는 공화주의에 대한 감수성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보낸 많은 이들이 얘기한 ‘지지의 변’에 반드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당 대표 시절, 어떤 정치적 유불리에 대해서도 계산하거나 협상하지 않고 우직하게 고구마 먹다 막힌 것처럼 답답할 정도로 ‘원칙’만 고집하며 당의 혁신을 꾀했던 모습을 지켜보며 그 ‘원칙주의’야 말로 우리 사회의 적폐 청산과 재조산하에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 ‘원칙이 기본이 되는 정치’에는 저런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던 학습 경험을 부수기 위해 당장의 불편함도 감수하겠다는 높은 수준의 시민으로서의 정치의식이 필요하다. 그런 시민의식으로 비롯된 지지가 없다면 정치는 고립되고 흔들리고 멈출 수밖에 없다. 그건 앞서도 얘기했던 것처럼 ‘조금 더 불편하고, 조금 더 손해를 볼 때’ 또다시 적폐 세력을 눈감고 용인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어떤 대단한 잘못된 불법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만연하게 한 오랜 학습 경험이 곧 적폐임을 인식하고 그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 의지가 우리 사회 시스템의 신뢰를 만들어 낼 때 저렇게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결과적으로 자신 역시도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져서 지불해야 하는 사회 비용을 높이는 ‘불신’을 막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정치’다.

 

적폐청산을 두고 ‘적폐청산이 최우선’이라면서 절차나 시스템은 그 과정에서 어길 수도 있다고 하는 정치인은, 바로 저런 이유로 인해서 멀리해야 하는 인물이다. 진정한 적폐는 바로 그 ‘절차와 시스템을 무시하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원문: 손원근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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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의 죽음은 박정희 시대의 ‘생물학적 사망’을 선언한다 https://www.ppss.kr/archives/168931 https://www.ppss.kr/archives/168931#respond Wed, 11 Jul 2018 02:57:07 +0000 http://3.36.87.144/?p=168931
출처: KBS

박근혜의 탄핵이 박정희 시대의 정치적 사망을 선언하는 느낌이라면, 김종필의 죽음은 박정희 시대의 생물학적 사망을 선언하는 느낌이다. 많은 이들이 김종필의 죽음으로 ‘3김 시대’의 종언을 얘기하지만, 그 ‘3김 시대’ 마저도 박정희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김종필의 타계는 사실상의 박정희 시대의 종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박정희 시대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잘살아 보세’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산업화를 통한 집중적인 경제개발과 국부의 창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국부의 창출을 위해 개인의 권리는 제약되었고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 역시 우선순위에서 배제되었다. 이른바 전체의 가치가 개인의 가치를 앞선 시대였고, 그래서 박정희 시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곧 ‘전체의 시대’인 것이다. 그 그늘에서 지역주의, 권위주의, 보스정치, 정경유착 같은 요소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라던가 시비 여하와는 별개로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한국 현대사의 큰 줄기를 차지한 ‘박정희 시대’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3김 시대’로 대표되는 민주화 시대는 바로 그 ‘박정희 시대’의 가치가 박정희의 죽음과 별개로 이어지는 상태를 끝내기 위한 긴 싸움의 연장이었기에, ‘3김 시대’ 역시도 어떻게 보면 ‘박정희 시대’의 끝자락에 놓인 그 시대의 일부이다.

이러한 ‘박정희 시대’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가 그 이후의 무엇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노무현의 당선 이후부터이다. 박정희 시대의 가장 큰 화두였던 ‘절차적 민주주의’의 도입은 어쨌건 간에 김영삼과 김대중의 당선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연함’이야말로 바로 박정희 시대를 빠져나오게 되는 터널 끝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 터널의 끝을 벗어나면서 우리 사회는 비로소 ‘국가’나 ‘전체’에 가려져 있던 ‘개인’의 가치를 얘기하기 시작했고, ‘형식 민주주의를 완성시켜야 한다’라는 시대적 과제에 가려져 있던 민주주의의의 보편성의 확장과 그 본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잘사는 것’에 이어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에 대한 화두가 대두되었고, ‘성장’에 가려져 있던 ‘분배’의 문제도 본격적으로 사회의 시대 정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박정희 시대’의 정체성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또 다른 시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들이다.

권력을 등에 업고 특권을 누리는 국가기관은 지금 없습니다. 권력이 합리화되었고 정경유착이 끊어졌습니다. 권위주의도 해소되었습니다. 저는 흔히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우리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 불만을 가진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이 말을 잘 쓰지 않지만, 어떻든 이것은 이제 완성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런 노무현의 발언은 이러한 시대 전환에 대한 환기이다. 이 ‘전환’에 대한 시대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또한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정치인 노무현, 혹은 인간 노무현에 대한 평가 혹은 세간의 지지와는 별개로, ‘박정희 시대’의 종언과 함께 접어든 ‘박정희 이후’ 시대의 우리 사회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난 바로 ‘노무현 시대’라고 본다. ‘박정희 시대’가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 낸 정체성들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다툼이 만든 것이었던 것처럼, 이제 그것들에 대한 논쟁을 뒤로하고 우리 사회가 고민하고 다투는 많은 것들은 바로 노무현 정권의 탄생과 함께 화두로 던져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무현 정권의 탄생과 함께 우리 사회에 던져진 화두들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새로운 시대로 우리 사회를 이끌면서 우리가 ‘박정희 시대’를 빠져나오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그를 지지하든 아니든 간에, 이제 우리 사회가 논의하고 다투는 화두들은 ‘박정희 시대’의 산물이 아닌 ‘노무현’의 산물들이다. 그래서 이 시대는 바로 ‘노무현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난 김종필의 타계 소식에서 노무현을 떠올린다.

정재웅 님의 표현을 잠시 그대로 빌려 오자면, 박정희에서 시작된 한 시대가 저물고, 노무현에서 시작된 한 시대가 열렸다.

노 : 노무현의 시대가 오겠어요?

유 : 아, 오지요. 100% 오죠 그거는. 반드시 올 수밖에 없죠.

노 : 아, 근데 그런 시대가 오면 나는 없을 것 같아요.

유 : 아니 뭐 그럴 수는 있죠.

유 : 후보님은 첫 물결이세요. 새로운 조류가 밀려오는데 그 첫 파도에 올라타신 분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근데 이 첫 파도가 가려고 하는 곳까지 바로 갈 수도 있지만, 첫 파도가 못 가고, 그다음 파도가 오고, 그다음 파도가 와서, 계속 파도들이 밀려와서, 여러 차례 밀려와서 거기 갈 수는 있겠죠.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새로운 시대정신과 새로운 변화, 새로운 문화를 체현하고 있으시기 때문에 첫 파도 머리와 같은 분이세요, 후보님은. 근데, 가시고 싶은 데까지 못 가실 수도 있죠. 근데, 언젠가는 사람들이 거기까지 갈거예요. 그렇게 되기만 하면야 뭐 후보님이 거기 계시든 안 계시든 뭐 상관있나요?

노 : 하긴 그래요. 내가 뭐 그런 세상이 되기만 하면 되지. 뭐 내가 꼭 거기 있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 영화 <노무현입니다> 중

원문: 손원근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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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상연맹의 볼드모트, 그를 둘러싼 사람들 https://www.ppss.kr/archives/154788 https://www.ppss.kr/archives/154788#respond Tue, 20 Feb 2018 07:11:18 +0000 http://3.36.87.144/?p=154788 1.

전명규가 오랜 빙연 파벌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인 거야 두말해 봐야 잔소리겠지만, 한체대 파벌의 건너편에는 D대를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졌었던 비한체대 파벌도 존재한다. 호사가들의 얘기처럼 전명규가 정말 빙연 파벌의 절대적 존재라면 비한체대 파벌이라는 게 과연 존재나 했을까.

파벌 문제는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소위 전명규파에 속했던 안현수는 훗날 양쪽으로부터 모두 미운털이 박히기 전까지는 한체대 파로서 비한체대 파의 견제의 희생양이었고, 마찬가지로 한체대 파에 속하는 이승훈은 비한체대 파가 득세했던 시기의 쇼트트랙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당시 마찬가지로 쇼트트랙에서 밀려나 롱트랙에서 선수들을 양성하고 있던 전명규의 권유로 롱트랙으로 건너와서 비로소 빛을 보기도 했다.

출처: 연합뉴스

전명규가 한국 빙상 역사에서 이름을 지우기 힘들 만큼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혹자는 그를 두고 그래서 ‘빙연의 볼드모트’라고 까지 하는데, 사실 그의 힘이 막강하던 특정 시기에는 그를 두고 이름 대신 ‘그 사람’이라고 부르기까지 했었으니 이는 아예 우스개 소리로 치부하기도 힘든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힘 얻은 과정을 보면 여기서도 경계가 희미해져 버린다.

 

2.

쇼트트랙에서 김기훈이 금메달을 따며 소위 전명규 라인이 약진을 하기 전, 대표팀의 이런저런 선수 선발 과정에 빠질 수 없이 등장했던 건 ‘돈’이다. 부모의 재력이 대표팀 자리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빙상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수많은 학원 스포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깐 사실 낯선 풍경은 아닌데, 전명규는 이 ‘규칙’을 깨버렸다.

전명규가 문제가 없었던건 물론 아니다. 구타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익히 알려졌다시피 메달을 딸 수 있는 선수의 메달 획득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팀플레이라는 미명 하에 실력이 부족한 선수들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실력이 안 되는 선수가 부모의 재력으로 대표가 되고 에이스가 되는 일은 그의 치세(?)에는 잠시나마 사라졌고, 그렇게 만들어 진 경기력은 앞서 얘기한 그의 ‘팀플레이’와 더불어 그대로 대표팀의 경쟁력이 되기도 했다.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시상대에서 하루가 멀다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던 한국 쇼트트랙 전성기의 여명에는 그렇게 전명규의 빛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 그러면 그 ‘돈’으로 대표팀 자리를 사서 좋은 학벌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부모들과 그 부모들이 주는 돈으로 기득권을 만들고 라인을 만들던 그 이전의 기득권들은 어디로 갔을까. 빙연의 지리한 파벌 싸움의 초기에 ‘전명규파’와 ‘비 전명규파’는 그렇게 나눠지기 시작했다.

 

3.

‘빙연의 볼드모트’가 메달 리스트들을 양산해내 가며 승승장구했더라도 빙연의 모든 인물들이 전명규 라인으로 바뀐 건 아니었다. 전명규 이전에도 빙연은 있었고, 그 인물들은 라인이 쪼개지기 전에는 하나의 기득권이었다. 그 기득권의 해체가 ‘파벌’이라는 결과물이다.

부자 망해도 3년 가는데, 오랜 기간 기득권과 그 기득권을 중심으로 한 라인의 중심에 있던 이들이 단순히 그리 밀려나지는 않는다. 전명규도 전명규대로 메달리스트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한체대를 중심으로 선수들을 키워 나가면서 라인을 만들고, 그 밖에서는 D대를 중심으로 비한체대 파라는 이름 하에 라인이 만들어졌다.

그 둘의 싸움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대표팀 선발과 메달 몰아주기를 이용해서 이뤄졌다. 그 두 가지에 자신의 인생이 걸려 있는 선수들은 약자였고, 약자라서 비겁해질 수 밖에 없었다. 혹자는 그 안에서 공범이 되기도 했고, 변천사 같은 이들은 공범이 되길 거부하고 스스로 양쪽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 안에서 안현수나 진선유 같은 전 국민이 아는 피해자들이 나오기도 했고, 한번 떠 보지도 못하고 파벌의 그늘에서 사라진 선수들도 나왔다.

이 풍경 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해 내기란, 그래서 쉽지 않다. 전명규의 한체대 라인이 주도권을 잡았을 때는 비한체대 선수들이 불이익을 받기도 했지만, 비한체대 라인이 주도권을 잡았을 땐 돈을 받고 대표팀에 선수를 넣어주는 구태가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이 안에서는 흔한 수사로 쓰는 말이 아니라 정말 모두가 가해자가 되기도 했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4.

출처: KBS2

김보름, 그리고 박지우의 선택은 사실 파벌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파벌의 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언제나 선택은 선수 본인의 몫이다.

이승훈은 한체대 라인의 선수이자 전명규의 수제자 중 한 명이고(사실 밴쿠버 올림픽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둔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의 뒤에는 당시 쇼트트랙에서 비한체대 파에 밀려 주도권을 잠시 놓고 롱트랙에 전념하던 전명규의 존재를 빼놓고 얘기하기는 힘들다), 또한 노선영이 밝힌 것처럼 다른 비한체대 선수들과 따로 훈련하기도 했지만, 경기에서는 그와 상관없이 후배들을 이끌고 뒤에서 밀어주며 세계 랭킹 1위인 네덜란드를 2위로 밀어내고 팀추월 예선 1위로 4강에 진출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승훈 본인이 한때 파벌의 희생양이기도 했거니와 개인의 인격, 그리고 적지 않은 나이에서 오는 이성적 판단도 한몫했겠지만, 어쨌든 파벌은 파벌이고, 팀추월에서 저런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건 본인의 선택이라는 얘기다.

즉, 김보름과 박지우의 ‘선택’은 파벌의 결과물이지만 본인들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난은 본인들의 선택에 대한 결과물이고 본인들이 책임지고 감수해야 하는 영역이다.

다만, 한가지 얘기하고 싶은 건 저렇게 얽히고설킨 빙연의 오랜 파벌 문제, 그것도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선악의 구분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공간 안에서 아직 어른들의 수 깊은 욕망과 그 욕망에 따른 셈법을 이해 못 하는 어린 10대 시절부터 사회와 격리되어 스포츠만 바라보고 살아온 선수들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판단을 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전에 한번 여자 쇼트트랙 선수들 간의 미니홈피에서 비슷한 문제가 불거진 적이 있었을 때 ‘저 세계’에 몸을 담았었던 이가 대략 이런 내용의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운동하는 애들 단순합니다. 어떻게 보면 군대랑 비슷해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위에서 얘기하는 거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게 익숙한 애들이예요.

그렇게 10년 넘게 커온 애들이니 위에서 쟤 나쁜 놈들이다 하면 그대로 믿는 거예요. 쟤네 안 밀어내면 너네들 대표팀 떨어져서 평생 해온 거 물거품 된다 하면 그대로 믿는 애들입니다. 얘네들 그렇게 만드는 건 코치들이고 협회 어른들이지 애들이 아니에요.

쟤네들 엄청 못된 애들처럼 보이지만 운동 얘기 빼고 보면 그냥 또래 애들하고 똑같아요. 드라마 보고 꺄르르 거리고 예뻐 보일려고 화장 어떻게 해야 하는지 셀카 각도 어떻게 해야 더 예뻐지는지 고민하는 평범한 10대, 20대 애들입니다.’

물타기 하는 거 아니다. 다만, 이런 면도 봐주라는 얘기다. 적폐 청산은 언제나 구조와 시스템을 향해야지 사람을 향하면 실패한다. 저들은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지만, 동시에 저들을 그렇게 만드는 시스템도 주목해야 한다는 얘기다.

 

5.

오늘 여기저기서 언급되고 있는 저 ‘빙연의 볼드모트’만 척결하면, 그래서 한체대 파벌을 몰아내고 나면 빙연의 파벌 문제는 해결될까?

출처: 연합뉴스

빙연의 파벌 문제는 그 시작과 원인의 지점에서조차 선과 악을 단순하게 나누기 힘들만큼 복잡한 구조 안에서 오랜 기간 문제가 문제를 낳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며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당장 빙연 파벌 문제의 대표적 피해자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 안현수조차 어떤 부분에서는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는 것도 힘들 뿐더러 그렇기 때문에 몇몇을 제거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오랜 기간 누적되어 만들어진 폐단을 우리는 적폐라고 부른다. 빙연의 파벌 문제는 그야말로 그 적폐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문제다.

이런 적폐를 해결하는 건 인적 개혁이 아니다. 잘못된 시스템 안에서 모두가 가해자일 수도 있고 모두가 피해자일 수도 있는 누적된 폐단 안에서의 인적 개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명규를 날려봐야 또 다른 전명규가 나올 거고, 한체대파를 없애봐야 비한체대파가 나뉘어져서 또 다른 XXX파와 비XXX파가 만들어진다.

사실, 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얘기다. ‘어떻게’가 중요하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다. 그 ‘어떻게’를 얘기하지 않는 문제 제기는 그래서 공허하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얘기라도 해야 하는 건, 지금 이 문제가 한 사람의 ‘악’만 제거하면 해결될 듯한 분위기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제거될 ‘악’도 아니거니와 그렇게 단순한 문제도 아니고 그렇게 하면 또 다른 ‘악’이 그 자릴 차지할 뿐이고, 그렇게 어른들이 만들어 내는 기득권의 쟁탈전 안에서 욕먹고 상처 입고 서로를 미워하는 괴물이 되어 또 다른 기득권의 중심이 되어 가해자가 되는 건 어린 선수들일 뿐이다. 난 이걸 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PS.

한가지 덧붙이자면, 저 ‘빙연의 볼드모트’가 그렇게 힘이 세다면, 어떻게 오늘 같은 저격 기사들이 여기저기서 나갈 수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스포츠 기자들은 해당 협회와 척을 지면 취재가 힘들어진다. 전명규가 정말로 빙연의 처음이자 끝으로서 빙연의 모든 것이라면, 오늘 같은 기사가 나갈 수 있을까? 그 기사는 누가 기자들에게 내보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일까? 박수 소리는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나는 법이다.

원문: 손원근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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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 꼭 암호화폐의 유통으로 이어져야 하는가? https://www.ppss.kr/archives/152091 https://www.ppss.kr/archives/152091#respond Thu, 01 Feb 2018 07:56:33 +0000 http://3.36.87.144/?p=152091 cryptocurrency와 관련된 문제 제기 중 가장 일반인들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블록체인이 중요하면 블록체인 기술에만 투자를 하면 되지 그게 꼭 암호화폐의 유통으로 이어져야 하는가?‘일 것이다. 이를 두고 퍼블릭/프라이빗 채널을 구분하여 설명하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엔지니어링 관점에서면 몰라도 그게 이 부분을 궁금해하는 일반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고 해서 다시 한번 정리.

  • cryptocurrency의 번역어로 난 암호화 토큰을 쓰려 한다. 일전에도 이 모든 오해는 ‘가상화폐’라는 번역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얘길 한 적이 있기 때문. 특히나 ‘화폐’라는 단어는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단어다. 직역된 ‘암호통화’가 가장 적절한 의미이겠지만, ‘통화’ 조차도 ‘화폐’와 별반 다르지 않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아서 암호화 토큰을 선택.
  • 사전에 이 글이 글을 읽고 나서 보면 더 이해가 쉽다. 내가 쓴 글의 경우, 내가 쓰는 글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일전에 언급한 부분들은 생략하는 습관이 있어서…;;
  •  추가로 기술적 이해를 위해서는 이 글도 참고해 보는걸 추천한다.

자, 이제 시작.

 

1. 블록체인 네트워크와 암호화 토큰 사이의 상관 관계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신뢰도는 앞서 다른 글에서도 얘기했다시피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생성하는 노드의 형성과 유지에 의해서 보증된다. 좀 더 쉽게 얘기하자면, 블록체인의 무결성에 대한 신뢰는 동일 장부의 존재에 의해 보증되는데, 이게 의미가 있으려면 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1. 동일한 장부의 다량 존재
  2. 동일한 장부의 연속적 생성

전자는 유의미할 만큼의 통계적 신뢰를 위해서, 후자는 각 반영 속도 차이에 의한 정보의 격차가 발생했을 때 좀 더 신뢰도 높은 정보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깐, 기술적인 설명 다 제외하고 그냥 편하게 얘기하자면, 블록체인은 분산원장의 생성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두면 된다. 일단은.

그런데, 이 블록체인의 분산원장의 유지는 그냥 자동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어떤 전제가 되는 행위가 필요한데, 이걸 그냥 단순하게 거래장부라 생각해 보자. 거래장부가 새로 업데이트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바로 거래의 성립이다. 마찬가지로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 일반적으로 분산원장의 생성과 유지를 가능케 하는 건 바로 거래의 성립, 즉 토큰의 이동이다. 이는, 암호화 토큰이 바로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의 노드의 형성에 의한 보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암호화 토큰은 한번 생성되고 끝나면 되는 게 아니다. 앞서서도 얘기했다시피 지속적인 생성이 발생해야 노드의 수도 늘어나면서 블록체인의 신뢰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건데, 그럴려면 지속적으로 ‘거래 – 생성’이 발생해야 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이러한 토큰의 ‘거래 – 생성’을 유인할만한 동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원되는데 바로 ‘화폐 가치의 부여’이다. 즉, 네트워크 참여자들에게 토큰의 보상으로서 무언가 주어져야 토큰의 생성과 이동을 계속 유인할 수 있는데, 그게 바로 거래를 통한 가치 상승에 대한 기대다. 전형적인 자본 거래를 통한 자본 가치 획득과 이를 통한 경제 효과를 기대하는 형태다.

출처: Financial Tribune

쉽게 말하면, 블록체인의 기술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암호화 토큰의 지속적 거래가 필요한데, 현재로서 이 거래를 일으키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은 자산가치에 대한 기대밖에 없다. 그걸 위해서 뛰어들게 함으로써 시스템은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신뢰도를 유지할 수 있다.

즉,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가상화폐의 거래 없이도 블록체인 기술은 발전시킬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지적은 블록체인의 특성을 몰라서 하는 얘기라는 것이다.

 

2. 투기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가

앞에서 블록체인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는 토큰의 거래가 필요하고 그 토큰의 거래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즉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동기를 부여해야 하는데 그건 자산가치에 대한 기대로 인한 자발적 참여밖에 없다는 얘길 했다.

그렇다면 ‘블록체인은 투기를 조장하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 없는 모델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건 조금 다른 문제다. 미리 얘기하자면 이 지점에서 블록체인을 둘러싼 논의에서 기술성과 정치성이 갈라진다.

앞서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 신뢰도의 보증은 분산원장의 지속적 생성과 유지에 의해 보증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지속적 거래가 발생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건 한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통제자’의 존재를 부인했을 때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통제자의 존재를 인정하면 저 요소는 필수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즉, 자연 발생적으로 분산원장이 만들어지고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통제되는 환경에서라면 암호화 토큰은 불특정 참여자들의 참여가 없더라도 생성되며 이를 통해서 블록체인의 무결성은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다는 얘기다.

좀 더 쉽게 얘기하자면, 통제자를 인정한다면 암호화 토큰의 거래 없이도 노드의 유지가 가능하다. 즉, 자본 가치 상승에 대한 기대로 시장 참여자들의 투기를 유도하지 않더라도 기술의 발전과 적용은 가능하다는 얘기다.

내가 등장할 차례군 아님

그런데 왜 사람들은 ‘블록체인은 암호화 토큰의 거래를 필수로 한다’고 얘기하는 걸까? 이건 기술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문제인데, 그러니까 저렇게 통제자의 존재를 인정하면 ‘어떠한 경우에라도 위변조가 불가능하다’라는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무결성이 조건부로 바뀌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저렇게 되면 ‘통제자’는 적어도 이 분산원장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절대자의 위치에 오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권력을 획득하게 되는 것인데 이는 블록체인이 애초에 추구했었던 이념과 배치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바로 블록체인에 내재되어 있는 정치성이다. 그러니까 블록체인은 애초에 순수한 기술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미까지 포함된 이론이라는 얘기다. 국가와 같은 통제자에게 신뢰도 확보를 위한 심판관의 역할을 맡기는 조건으로 통제 권력을 이양하지 않더라도 자연상태에서 순수 참여자들의 활동만으로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신뢰도가 통제되고 그 보상은 참여자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는 기술!

최초의 비트코인 탄생 자체에 내재된 것도 바로 저런 정치적 요소이고, 그게 궁극적인 블록체인이라 주장하는 이들은 저런 정치적 요소의 실현까지도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기술적 요소가 아니라 정치적 요소가 반영된 부분이라는 얘기다.

블록체인이 대단한 기술이라 하는데도 불구하고 기술적 요소에 대해 그리 높게 보지 않는 엔지니어들의 관점을 가끔 접하는 경우도 있을 텐데, 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블록체인의 가치에는 기술적 요소뿐만 아니라 정치적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저 통제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말고는 사실 정치적 관점이고, 그걸 제외하고 본다면 순수 기술적 의미에서는 통제자의 존재만 인정한다면 토큰의 거래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아니게 된다. 즉, 지금과 같은 ‘보상을 통한 유도(자본 투기) – 토큰 거래 – 블록체인 노드 유지’의 사이클을 타지 않더라도 블록체인의 무결성은 (다분히 조건부이긴 하지만) 획득 가능하다.

 

3. ‘현실적’으로 타협 가능한 지점

위의 ‘통제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블록체인은 이미 나와 있다. 채굴하지 않더라도 노드가 유지되는 블록체인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리플이나 스텔라와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인데, 이들은 노드의 생성과 유지의 증명으로서 암호화 토큰이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중앙의 통제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토큰의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지고(채굴) 또한 거래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여담이지만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하는데, 저런 이유로 인해서 리플 코인의 가치는 리플의 비즈니스적 가치와는 별개다. 하지만 리플 코인의 보유자들은 그 둘을 동일시하여 리플 코인에 대해 비즈니스 가치의 상승을 통한 코인 가치의 상승을 기대하고 투자하는데, 사실 잘못된 생각이다)

이 얘기를 왜 하냐 하면, 궁극적인 의미, 그러니깐 정치적 의미까지 포함한 것으로서 최초에 사토시 나카모토가 궁극적으로 추구했었던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달성을 위해서는 암호화 토큰의 거래가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래서 투기가 곧 블록체인 기술의 발전의 필수 조건처럼 여겨지겠지만, 그건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이상향의 추구까지 그 안에 포함시킬 때 해당되는 얘기다. 블록체인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요소만을 현실에 대입시키기 위해서는 그중 분산원장 기술만 가지고 와도 크게 무리는 없다는 얘기다.

물론 이때 ‘통제자’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그 ‘통제자’의 선의를 전제하여 많은 권력을 국가와 권력기관, 그 외에 수많은 약속된 단체에 위임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때의 ‘우리가 최대한의 선의를 가정할 수 있는 통제자’는 결국에는 국가일 수밖에 없게 된다. 혹은 국가로부터 그 권력을 위임받은 기관이던가. 물론 그건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블록체인의 지지자들도 다수 존재하겠지만, 국가의 요체는 물리력이다. 강제할 수 있는 물리력을 가진 국가가 이 지점에서 합의점을 찾으려 들 때 이를 막을 수 있는 개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사토시 나카모토는 이러한 개개인의 무력함을 암호화 토큰에 부여된 자본 가치에 대한 기대와 그 보상으로 뭉친 개개인이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비트코인’이라는 희대의 개념을 탄생시키고 (하필이면) 화폐의 성격을 부여한 것이겠지만, 그게 실질적 물리력을 담보할 수 있게 되기까지 현재의 물리력은 그걸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는 다분히 이상적 관점이다.

바로 이 사람이 사토시 나카모토
출처: THE SUN

하여 아마도 이 논란의 귀결은 어쩌면 리플처럼 ‘통제자’의 존재를 전제한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운영이 가능한 기술을 보안 및 암호화 분야, 혹은 스마트 계약 등의 분야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자리 잡아 나가게 되지 않을까. 그게 현실의 권력이 블록체인이 갖는 기술적 의미와 만나게 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인터넷도 최초에는 기술적 의미보다 아나키즘적 의미가 강했지만, 현실에 자리 잡게 된 것은 현실 정치 -즉 국가 권력의 적당한 통제 범위 내에서 기술적 요소들만 자리 잡았을 때부터였다. 아마도 비슷한 경로를 걷게 될 것이라 본다.

타협점이 없으면 모를까, 존재한다는 것. 이게 중요한 지점이다. 오늘은 이 정도로. 총총.

 

PS 1. 물론 이는 기술적인 타협점이고 자본의 관점에서 본다면 또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는데, 이미 암호화 토큰의 거래 시장은 뭐가 되었든 간에 무시하지 못할 자본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이에 주목하는 자본이 늘어날수록 자본 시장에서의 가치는 확장될 것이고, 이는 ‘암호화 토큰의 거래를 필요로 하는 시장’의 존재 가치를 계속해서 만들어 낼 것이다.

난 종종 시장은 기술의 의지가 아니라 자본의 의지대로 만들어진다고 얘기하곤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라면 앞서 얘기한 저런 기술적 타협점이 존재하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자본의 선택에 의해 보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블록체인 기술 – 즉, 암호화 토큰의 지속적 거래를 요구하는 블록체인 시장이 계속해서 확장되고 유지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질 수 있다.

(사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사토시 나카모토가 굳이 ‘화폐’의 기능에 집중한 것도 자본 가치 상승에 대한 대중의 기대 심리를 통해 자본 가치를 확대함으로써 이런 자본 시장의 선택을 유도하기 위한 포석이 아니었을까 싶다)

반대로, 기술적 타협점이 저 지점에서 이뤄진다면 지금의 암호화 토큰 거래 시장은 차차 그 비중이 약해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계속 알트코인들이 나올 것이고 ICO도 진행되고 그래서 나름의 거래도 일어나겠지만, 시장이 ‘통제자가 통제하는 블록체인’을 선택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그 시장의 중심적인 자본 유입은 기존의 전통적 시장에 편입될 것이고,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장내 진입을 위한 희망 고문의 장이 될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게 언제 도래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PS 2. 그와 별개로, 그러면 미리 통제하고 폐쇄하는 게 맞지 않나 – 하는 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아직 우리는 저 부분에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최적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어떤 지점에서 최적지를 찾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리 통제해서 정치적 부담을 제거해 놓고서는 나중에 다른 이들이 만든 길을 따라가겠다는 논리는 딱 정확하게 산업화 시대 논리이자 관치 논리다.

PS 3. 그러면 지금 통제하더라도 블록체인 기술의 발전에 악영향을 주는 건 아니지 않나 – 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꼭 그렇지는 않다.

앞서서도 얘기했다시피 모든 기술은 초기에 다양한 방법론이 제시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선택의 길이 열려야 자본의 유입을 통한 기술 개발의 가능성도 커진다. 그리고 그런 측면을 떠나서 순수 정무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난 반대인데, 과거 코스닥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코스닥도 따지고 보면 증시에 상장되기 힘든, 하지만 IT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등장한 수많은 닷컴 기업들에 대한 투기성 투자 열기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여 안전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정치적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이를 통해 돈이 돌게 함으로써 경제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도록 유도한 정책이었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네거티브 하게 가는 방식이 있고 포지티브 하게 가는 방식이 있는데 난 후자를 지지한다. 어차피 존재하는 에너지라면 부작용을 우려해서 굳이 꺼뜨리기보다는 어떻게든 플러스가 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정책을 고려하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현 정부의 관료들이 DJ 정부가 고심했던 부분을 벤치마킹해 봤으면 싶다.

원문: 손원근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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