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www.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Wed, 20 Mar 2019 10:16:01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www.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www.ppss.kr 32 32 중국공안국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1 https://www.ppss.kr/archives/189694 Tue, 12 Mar 2019 08:38:01 +0000 http://3.36.87.144/?p=189694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차 북미 정상회담 취재 과정에서 핑샹 공안국 파출소 유치장에 억류된 경험을 글로 적어 소개하는 글입니다. 굉장히 특수한 경험이라 기록으로 남깁니다.


  • 일시 : 3.1 15:30 ∼ 3.2 19:00
  • 장소 : 중국 광시(廣西) 장족자치구 핑샹(憑祥) 공안 파출소

 

희귀한 경험

살다 살다 별 경험을 다 해 본다지만, 중국 공안국 유치장에 들어가는 경험은 정말 특별(?)했다. 중국에서 취재를 하다 보면 가끔 공안과 마찰을 빚는 때가 있다. 대부분 한국에서 기자로서 편하게 취재를 하다가 강력한 통제 사회인 중국에 와서 양자 간 온도 차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베이징 같은 경우는 외신 기자가 공개된 장소에서 취재할 권리기 있기 때문에 보통 2~3시간 정도 구류됐다가 풀려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변경지역인 핑샹은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에 핑샹에서 사달이 난 것은 다 내 판단 미스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매체들 중 가장 핑샹에 빨리 왔기 때문에 현지 분위기를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열심히 세운 취재 계획을 갑자기 변경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원래 계획은 핑샹에서 집중 감시 대상인 나는 난닝에 남고, 영혜 혼자서 핑샹에 잠입하기로 합을 맞췄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 촉이 자꾸 같이 핑샹에 갔다가 나와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아무래도 영혜 혼자 보내기에는 핑샹 상황이 너무 위험할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난닝에서 핑샹으로 들어가는 변경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오자마자 공안의 검문을 받게 됐다. 사실 이번 일의 근본적인 원인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담배 피우는 모습을 난닝 역에서 촬영한 일본 TBS 때문이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그 기자가 들고 있는 것이 카메라가 아니라 총이었다면 김정은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던 엄청난 의전과 경호 실수인 셈이다.

당연히 난닝과 핑샹 등 지역 공안들에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보통 간단하게 신분증 확인을 하고 방문 목적을 물을 때 “관광”이라고 답하면 보내주던 공안들이 조사를 상당히 디테일하게 했다. 게다가 잠시 뒤에는 사복을 입은 한 간부급 인사가 와서 추가 조사를 진행했다. 이후 알게 됐지만, 이 사람은 중앙에서 내려온 중국 국가안전부 소속 간부였다. 중국 국가안전부는 한국의 국정원과 비슷한 조직으로 국가의 안보나 기밀과 관련된 위반행위를 단속한다.

처음에 이 온화한 인상의 간부는 나에게 공안과 비슷한 질문을 했고, 나는 으레 대답하는 “관광”이라고 했다. 그 인사는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가방 안 카메라는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영혜와 나를 분리해 따로 심문하기 시작했다.

 

시시비비

영혜를 분리하자마자 내 머리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영혜가 나와 같은 사고와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제대로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출장 출발 전에 비상상황이 나면 무조건 내 통역 겸 가이드라고 말하라고 했는데 그걸 기억할까? 온갖 생각을 하다가 여기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시시비비를 따져봤다.

‘내가 여기 온 것이 법규를 위반한 것인가’부터 생각을 시작했다. 사실 중국 정부는 국가급 지도자가 방중 할 경우 별도의 취재허가를 받아야만 현장 취재를 할 수 있다. 게다가 이곳은 내 주 활동무대인 베이징이 아닌 중국과 베트남의 접경지대다. 접경지대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매우 엄격히 법을 집행한다.

결론은 ‘내가 잘못했다’였다. 이때부터 나는 그냥 초지일관 반성 모드로 들어갔다. 솔직하게 김정은을 취재하러 왔고, 사진을 찍으려거나 위해를 가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가 진짜로 이동하는지 또 현지 분위기가 뭔지를 보러 왔다고 답했다. 영혜도 이미 영혜의 이전 방문 기록과 호텔 투숙 기록을 공안이 들이밀자 영리하게 나의 통역으로 따라왔고, 전에도 한번 왔었다고 진술을 한 상태였다.

내가 순순히 ‘죄’를 인정하자 그들의 태도도 한껏 유순해졌다. 그리고 핑샹 시내로 가서 간단한 조사만 받으면 바로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시간이 오후 6시 30분 께였다. 나에게 정당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고, 또 영혜를 보호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공안국에 갇히다

핑샹 검문소에서 처로 10분가량 달려 공안국에 도착한 뒤 우릴 내려놓은 국가안전부 사람은 한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공안들은 우리를 조사하지도, 또 뭔가를 묻지도 않고, 그저 소지품을 압수한 뒤 유지장 내에 우리를 앉혀뒀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났을까? 젊은 공안들이 영혜와 나를 분리해 조사를 시작했다. 영혜가 먼저 조사를 받았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왜 두 번이나 이곳에 왔는지와 방문 목적이 김정은 취재라고 하는데 영혜의 역할은 무엇인지 이런 류의 질문이었던 듯했다.

조사는 개인당 한 시간 남짓이었고, 조서도 빠르게 작성됐다. 이제 시간은 오후 10시가 다 돼 갔고, “나는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 날 것이다”라고 말한 그 인사에 대해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를 감시하는 공안에게 그를 불러달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조서에 인장을 다 찍을 때까지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거의 오후 11시가 다 돼서야 그는 우리 앞에 우리가 쓴 조서를 들고 나타났다.

나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고, 그는 “지금 상부에서 검토 중”이라는 말과 함께 우리의 휴대전화를 소지품 수거함에서 꺼내 비밀번호를 물어 가져 갔다. 영장도 없이 저런 짓을 잘도 하는구나 생각이 들면서도 정당성의 우위가 있는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부의 결정은 생각보다 늦어졌다. 우리는 서늘한 유치장에 놓인 나무의자에 앉아 고된 벌을 서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를 이곳에 데려온 이들 중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영혜는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이미 멘탈이 나간 상태였고, 나는 그런 영혜를 보며 내 판단 미스가 이런 일을 초래했다며 속으로 자책했다. 다만 겉으로는 미소를 잃지 않고, 영혜에게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하지만 솔직히 국가안전부 조사는 나도 처음 받아 보는 데다가 기존과 달리 구류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영혜의 상태 악화

이번 경험에서 내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영혜의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새벽 비행기를 타고 난닝 공항에 도착해 바로 김정은 위원장이 지날 난닝 역 주변에 숙소를 정해 두고 바로 핑샹에 온 터였다.

당연히 식사는 기내식 한 끼가 전부였고, 영혜는 여성들만이 겪는다는 고통까지 겹친 상태였다. 나는 속으로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으려 꽤 노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혜의 상태는 계속 심해져만 갔다.

결국에는 초기 조사에 이어 두 번째 조사가 끝나자마자 어지럼증을 호소했고, 공안들도 놀랐는지 어디선가 죽을 구해와 영혜에게 먹였다. 죽을 먹으면서도 감시는 계속됐고, 영혜에 대한 추가 조사도 이뤄졌다. 추가 조사를 마친 영혜는 이미 얼굴이 백지장같이 하얘져 있었다.

나는 우리가 대기하던 유치실 바깥쪽에 있지 말고, 유치실 안에 놓인 콘크리트로 된 침상에라도 누워 있으라고 영혜를 타일렀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영혜도 도저히 앉아 있지 못하겠는지 습기가 가득한 유치장 이불을 콘크리트 침상에 깔고는 누워서 잠이 들었다. 이때 시간은 이미 새벽 2시를 넘어섰다.

 

단식

영혜가 죽을 먹을 때 공안들은 나에게도 도시락을 건넸다. 하지만, 여기서 밥을 먹으면 뭔가 숙이고 들어가는 것 같아 밥을 거부했다. 그리고 혹시나 밥을 먹는 동안 영혜가 어디론가 이송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치실 앞을 지키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실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뭘 먹으면 오히려 속이 더부룩할까 봐 도시락을 먹지 않았다. 게다가 거기에 무엇을 넣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내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TBS 사건으로 바짝 독이 오른 공안이 우리에게 어떤 죄를 뒤집어 씌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새벽을 넘어 아침으로 향해가자 우리도 지쳤지만, 우리를 감시하는 공안도 지치기 시작했다. 한숨 잠을 잔 영혜는 다행히 기력을 찾았고, 지금까지 내가 파악한 상황을 영혜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내 카메라, 내 컴퓨터, 영혜 비디오카메라에 있는 영상을 지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 카메라는 마음씨 좋은 공안이 감시를 할 때 내가 옷을 꺼내는 척하면서 카메라를 켜서 카드를 포맷시켰다. 그리고 컴퓨터 바탕화면에 있던 지난 2년간 취재했던 사진도 드라마를 좀 보고 싶다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며 컴퓨터를 켠 뒤 눈물을 머금고 삭제했다.

여기까진 성공했으나 비디오카메라는 CCTV 두 대와 감지자 2명이 있는 상황에서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운에 맡기기로 하고 영혜와 나는 다시 면벽 수행과도 같은 유치장 대기를 재개했다. 이때 ‘선을 넘어 생각하다’는 시간을 보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4평 남짓 공간이 주는 두려움

영혜와 내가 갇힌 유치장은 진짜 범인을 가두는 유치실을 제외하면 화장실 하나와 책상 하나 죄수를 결박하는 의자 하나 나무 의자 4개 정도로 4~5평 정도 된다. 유치실 두 개가 오른편에 병렬로 마련돼 있고, 이를 지키는 공간이 우리가 대기하던 장소다.

유치실 안쪽에는 오픈된 화장실이 별도로 있고, 콘크리트 침상과 이불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현재 핑샹은 우기기 때문에 바닥에도 습기가 가득할 정도로 습했는데 새벽에는 한기가 올라와 뼈가 시렸다.

또 왼편에는 취조실이 별도로 마련돼 있지만 우리가 접근할 수는 없었다. 그곳에는 컴퓨터와 녹음 장비, 그리고 안에서 밖이 안 보이는 유리와 그 건너에 별실이 있었다. 이 취조실은 평소에는 변호사 접견실로도 사용되는 것 같았다.

사실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좁은 4평 남짓한 간수 공간에서 책을 보다가 유치실 안에 있는 콘크리트 침상에 가서 눕는 것 외에는 없었다. 유치실에는 이불이 있었지만, 너무 습기가 많아 곰팡내가 풀풀 풍길 정도여서 나는 도저히 누울 수가 없었다.

또 심리적으로도 정기적으로 영혜와 나를 조사실로 데려가 조사를 하는 것 외에는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통에 그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사람을 위축시켜 그곳에 누우면 꼭 내가 혐의를 인정하는 것 같아 싫었다.

더 걱정인 것은 나야 경찰청을 출입하면서 수도 없이 유치실을 다녀서 익숙하지만 영혜는 정말 크게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몸 상태까지 안 좋은 데다가 혹시나 국가보안법 같은 법률을 위반했다고 혐의를 씌우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도 태연한 척 잠을 청해 보기도 하고 의자에 발을 올리기도 하고, 별짓을 다 했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고, 4면의 벽이 점점 옥죄여 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록수가 여기까지 면회 오다가 짜증을 엄청 내겠지? 애들은 멀어서 오지도 못할 텐데 라는 쓸데없는 잡생각까지 하게 됐다.

원문: 돼지터리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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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안국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2 https://www.ppss.kr/archives/189696 Tue, 12 Mar 2019 08:37:50 +0000 http://3.36.87.144/?p=189696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차 북미 정상회담 취재 과정에서 핑샹 공안국 파출소 유치장에 억류된 경험을 글로 적어 소개하는 글입니다. 굉장히 특수한 경험이라 기록으로 남깁니다.


  • 일시 : 3.1 15:30 ~ 3.2 19:00
  • 장소 : 중국 광시(廣西) 장족자치구 핑샹(憑祥) 공안 파출소

 

4시 반 그가 왔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모든 조사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나타났다. 핑샹 공안국의 가장 높은 사람인 ‘주 경관’이었다. 부하들은 그를 주 경관이라 불렀고, 해병대 전우회같이 생긴 단단한 인상의 그는 눈빛부터가 후덜덜했다. 그는 우리를 보더니 나를 먼저 지목해 조사실로 데려갔다.

조사실을 보니 비디오카메라가 설치돼 있었고, 사진을 찍는 중간 간부 한 명도 있었다. 또 참관인으로 우리를 감시하던 중간 간부도 내 옆자리에 자리를 마련하고 앉아 있었다. 조사는 이전 조사와 달리 굉장히 위압적으로 진행됐다. 내가 영혜와 입을 맞추기 쉽게 통역으로 영혜를 불러 달라고 했으나 그냥 알아들을 수 있도록 진행할 테니 괜찮다는 답만 돌아왔다.

조사 내용은 이전과 같았고, 주로 내가 뭔가 국가 안보에 위해를 가하려 했는지를 자백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누가 당신 여기에 보냈냐?’ ‘서울 본부에서 가라고 한 것인가?’ ‘왜 두 번이나 이곳에 왔나?’, ‘취재 법규를 위반한 사실을 아는가?’ 등등 교묘하게 나를 함정에 빠뜨릴 질문들이 많았다. 밤새 조사를 받은 데다가 약간 졸리기까지 했던 나는 냉수를 달라고 한 뒤 정신을 좀 차리고 요리조리 함정을 피해 조사를 받았다.

주 경관은 나에게 “당신은 매우 중대한 기밀을 취재하려 했다”면서 “당신은 이 점을 이해했는가?”라고 물었다. 그의 질문에 “나는 단지 김정은이 진짜 가는지 또 현지 분위기가 어떤지 보러 왔을 뿐이다”라고 또박또박 대답을 반복했다.

그는 마지막에 “이 일을 복잡하게 끌고 가서 문제 삼을 수 있지만, 당신이 김정은이 간 뒤 여기서 나가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나는 이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딜을 해 왔다. 나도 이 정도면 받아들일만하다고 판단해 취재를 포기하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사가 끝나자 이 주 경관이라는 인사는 나에게 A4 용지로 프린트된 ‘외신기자 취재 법령’을 한 부 건넸다. 물론 이 장면은 다른 공안이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기록하고 있었다. 우리 둘이 악수하는 장면도 찍었고, 옆에서 조서를 작성하던 경관, 참관인까지 내 주위에 서서 방긋 웃는 표정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나는 무슨 동물원에 갇힌 코끼리 같았지만 정당성의 우위와 영혜의 안위를 결정할 그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조사가 다 끝난 뒤에도 주 경관은 자신이 관용을 베푼 것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고, 나에게 훈계조로 취재 주의사항을 읊어댔다. 내가 인상을 쓰면 그는 전가의 보도처럼 “이곳은 변경지역이다. 작은 일도 큰일이 될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놔 내 표정을 방긋 웃게 돌려놓았다. 나에 대한 조사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 영혜에 대한 조사는 매우 간단하게 끝이 났다.

 

여유로운 감방생활

모든 조사가 끝나자 이제 처분대로 기다려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 다가왔다. 주 경관은 우리가 필요한 것은 뭐든지 가져다주라는 말을 남기고, 공안국을 떠났다. 나는 주 경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영혜가 누울 새 간이침대와 새 이불을 달라고 했다. 그들은 이곳의 나폴레옹과 같은 주 경관의 어명이 있어선지 이전과 달리 빠릿빠릿하게 나무로 짠 간이침대와 새 이불을 구해왔다.

긴장이 좀 풀렸는지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죽을 좀 가져다 달라고 했다. 물론 해삼이 들어 있는 죽을 좀 달라고 했다. 그들은 군말 없이 내 부탁을 들어줬다. 죽을 먹은 우리는 새벽 6시 30분이 돼서야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 새 침대는 콘크리트 침상에 비하면 매우 과학적으로 만든 에이스 침대 같았다.

잠을 자고 일어난 시각은 다음 날 오전 10시께 아침을 먹겠느냐고 한 경관이 우리에게 물었다. 그때 주 경관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는 밤새 불편한 점이 없는지 필요한 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아침으로 죽 말고 요우탸오와 떠우장이 먹고 싶다고 말했고, 주 경관은 곧바로 부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잠시 뒤 한 경관은 요우탸오와 떠우장에 만두까지 챙겨서 아침을 가져왔다.

약간 재밌기도 하고, 아마도 내가 이들에게 큰 실적이 될 거 같기도 해서 나는 어디까지 해주나 시험을 해봤다. 아침을 먹은 뒤 우리를 감시하던 한 여경에게 혹시 여기에 과자가 있냐고 물었다. 그 여경은 공안국 앞에 마트가 있다고 답했고, 그럼 좀 사다 줄 수 있겠느냐고 재차 물었다. 그러자 여경은 자기 부하를 시켜 과자를 좀 사 왔다.

휴대전화를 조금씩 쓸 수 있는 것도 이때부터였다. 나는 일단 회사와 록수에게 내 상황을 알렸고, 대략 오후 3, 4시께 풀려날 것이라고 메시지를 넣었다. 그리고 나자 정신이 좀 온전해졌고 머릿속도 맑아졌다. 그제야 이곳이 어딘지 궁금해졌다.

우리를 감시하는 경관은 2~3시간 텀으로 바뀌었는데 그중 인상이 좋은 한 경관에게 출장 때 가져간 휴대용 혈압계를 보여주며 혈압을 재주겠다고 접근해 이곳의 위치가 철도와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 뒤 다시 점심시간이 찾아왔고, 나는 “이 지역 특산 요리를 먹고 싶다”고 요구했다. 공안들은 그렇다면 거위로 만든 차슈인 차샤오어(叉??)를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영혜와 나는 새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했다. 그러면서 한쪽 귀는 철도 쪽으로 안테나를 세워뒀다. 김정은 위원장의 특별열차가 지나갈 때는 상하행선 모두 열차가 통제되며, 기차 소리가 나면 틀림없이 북한 특별열차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점퍼 주머니에 숨기고 이불을 말아 덮은 뒤 감시 공안의 반대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2시 30분께 기차 소리를 들었다. 곧바로 베이징의 선배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이 내용은 바로 속보 기사로 처리가 됐다. 그가 갔다는 것과 출장 와서 뭐라도 일을 했다는 사실에 나는 마음의 평안을 다시 찾았다.

 

또다시 위기를 맞은 영혜

환경개선으로 잘 버텨오던 영혜가 오후 4시가 넘자 다시 무척 힘들어했다. 낯선 환경에 몸까지 안 좋으니 컨디션이 확 떨어졌던 모양이다. 영혜는 나한테 “지금 정신이 무너질 거 같아요”라는 이상스러운 말을 하고 고개를 책상에 박고 잠을 청했다. 답답한 공간에 너무 오래 있어 생기는 급성 공황장애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영혜는 불안해했다. 이미 김정은 특별열차도 지나갔겠다 나는 승부수를 띄웠다. 우리를 감시하던 여경에게,

“영혜가 너무 걱정돼 더는 못 기다리겠다. 열차가 지난 지 2시간이 넘었는데 우릴 안 보내주는 것은 약속 위반이다. 그리고 외신기자를 증거 없이 하루 이상 구금하는 것은 규정 위반이다. 대사관 통해 문제를 제기하겠다”

라고 하자 그는 상사에게 이 내용을 그대로 보고했다. 잠시 뒤 넘버 2인 여경이 우리를 찾아왔고 우리는 진피 보이차와 동남아 과일이 한상 차려진 다과상에 초대를 받았다. 넓은 공간에서 차와 과일을 마시고 먹으면서 영혜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여유를 찾은 것은 공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특별만찬을 준비했다. 식탁에는 양광(兩廣·광둥과 광시) 음식이 한상 떡하니 차려져 있었다. 여경은 식사를 마치면 난닝 역까지 가는 차를 공수해 주겠다고 친절까지 베풀었다.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영혜도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표정이 밝게 돌아왔다.

 

복기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유치장에 누워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공을 들여 세운 취재 계획을 내 즉흥적인 판단이 망쳤다는 것이 이번에 제일 아쉬운 부분이었다. 다만, 이미 공안이 철저한 검문검색을 한 것과 영혜가 지난번 왔을 때 호텔 복도에서 일본 매체와 접촉한 정황까지 알고 있었던 것, 또 지난번 방문 때 우리가 숙소를 3곳이나 돌았던 것도 그들이 이미 파악한 점 등으로 미뤄 영혜가 혼자 핑샹에 왔어도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게다가 나 없이 영혜 혼자 붙잡혔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 끔찍하다. 영혜는 틀림없이 이성을 잃고 무너졌을 것이다. 거기에 우리가 풀려나기 한두 시간 전에는 주요 기차역에 숨어 있던 외신 기자들이 공안에 발각돼 붙잡혔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왔다.

결론적으로 내가 난닝에 남았어도 나는 나대로 난닝에서 조사를 받고, 영혜는 영혜대로 핑샹에서 조사를 받아 더 상황이 악화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혜는 이번에 체력도 부족한 상태에서 큰일을 겪어 정말 힘들어했다. 내가 좀만 더 영혜를 믿고 혼자 보내거나 나와 따로 차를 타고 핑샹에 진입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이니 확신할 수는 없다.

처음엔 원망스러웠던 핑샹의 공안들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들도 김정은의 출현이 주는 충격과 근무 부담이 꽤 컸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공수해줬던 것은 감사하다. 다만 과격한 업무 집행과 밤샘 조사는 다시 생각해도 조금 과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이번 사건은 ‘운이 좋았다’라는 생각이 든다. 결과야 어찌 됐든 이번 사건은 국가안보와 관련된 위반 사항이 포함됐다. 지난해 일본의 한 광산 회사 연구원이 산둥의 광산 개발 합자를 위해 지질 환경 조사를 나왔다가 중국의 군사시설을 촬영한 것으로 의심이 된다는 혐의를 받아 실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그들의 면을 세워주고 탈출한 것은 잘한 선택 같았다.

여담으로 김정은의 담배 피우는 장면을 찍은 TBS의 카메라 스트링어는 베이징 공안국의 조사를 받느라 3월 1일 하루 종일 연락이 두절됐다. 2일 사무실에 출근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회사는 중국 전역에 배치한 특파원들을 철수시켰다. 그 과정에서 창사에 가있던 선양 특파원 후배도 공안에 붙들려 강제로 호텔을 옮겨야 했다. 당분간 타지 취재는 주의를 더 기울이고 영혜와는 동행보다는 영혜를 믿고 별도로 움직여야 할 듯하다.

핑샹 공안국 앞에서 택시를 타고 떠나오면서 우리를 마중하는 공안국 사람들과 악수를 나눴다. 그들은 그들의 일을 우리는 우리의 일을 했을 뿐이니 억하심정 같은 것은 남지 않았다. 그리고 3.1절에 이런 고초를 겪어선지 정말로 그 엄정한 일제 치하에 더 엄혹한 환경에서 이런 일을 겪었을 순국선열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가 아무리 이성적인 척 일본을 무작정 미워하지 말자고 외쳐봐야 그 당시 피눈물을 흘렸을 독립투사에게는 욕지거리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분들 덕분 아니겠나. 물론 나는 일본 문화를 사랑하고, 그들의 꼼꼼함과 정갈함을 좋아한다. 다만, 일본이 진정으로 사과를 하지 않는 이상, 최소한 독일만큼이라도 성의를 보이지 않는 이상 이 분야에서만큼은 그들을 향한 미움을 거두긴 힘들 것 같다.

원문: 돼지터리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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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구스’ 사태로 본 중국의 치졸함: 득인가, 독인가? https://www.ppss.kr/archives/183125 Thu, 03 Jan 2019 02:09:17 +0000 http://3.36.87.144/?p=183125
홍콩에 개점한 중화권 1호 캐나다 구스. 출처: 연합뉴스

중국과 캐나다는 최근 화웨이를 둘러싸고 일어난 미·중 간 신경전 사이에서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다. 사건은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하는 중에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중 정상회담이 진행되던 그 날 시작됐다. 미국은 정상회담에 나서는 한편 캐나다에 사주해 화웨이의 사실상 후계자인 멍완저우 화웨이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체포해 버리는 양면작전을 구사한 것이 이번 갈등의 단초가 됐다. 결국 보석금을 80억 원 넘게 내고 멍 부회장은 풀려나긴 했다. 그러나 이미 중국이 보복의 칼날을 캐나다에 꽂은 뒤였다. 당하고 가만히 있을 중국이 아니다.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늦지 않다. (君子復讐 十年不晩)’

뭐 복수는 반드시 하겠다는, 그런 뜻이다. 실제로 중국은 복수를 잘하는 편이다. 군자답진 않지만 말이다. 캐나다는 이번 일로 전직 외교관 한 명과 대북 사업가 한 명 등 모두 두 명이 중국 국가안전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 중국 국가안전부는 한국으로 치자면 국정원 급이다. 또 캐나다 유명 의류 브랜드인 캐나다 구스의 주가가 폭락하고 중국에서 불매 운동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이런 일들을 모두 중국 당국이 나서서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들이 배후에 서서 보복을 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특히 캐나다 구스 같은 경우는 강경 성향의 민족주의 매체인 환구시보 같은 중국 언론 매체에서 불매 운동을 부추기는 면도 있다. 오타와 대학에 계신 초파리 마스터 김우재 교수님의 말대로 그 고요하다는 캐나다에 이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중국의 이런 치졸함은 중국에 득이 될까? 독이 될까?

많이들 독이 된다고 하는데 나는 글쎄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중국은 굉장히 계산에 밝다. 자기가 어떤 일을 할 때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를 꼼꼼하게 따지고, 조금이라도 득이 되는 쪽을 택한다. 이번 일도 아마 득이 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물론 중국 진출했다가 망하는 케이스를 일컬어 ‘캐나다 구스 된다’라는 신조어가 생길 판이지만, 그래 봐야 중국 내수시장에 군침을 흘리는 기업은 넘쳐난다.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국가를 잡도리하면서 얻는 이익이 큰지, 아니면 대외 이미지가 똥망돼서 기업 탈출 러시가 일어났을 때 받는 피해가 큰지 이미 계산이 끝난 상태에서 자행됐을 것이다. 또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치졸한 행태를 보여 리더십을 잃는 것 vs 한번 꼬꼬마 국가들에 힘을 보여줘 패권 경쟁에서 나도 힘 좀 쓴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계산기 두들겨 보고 결정한 것임이 분명하다. 중국의 계산기는 캐나다 구스를 아니 캐나다를 두들겨 패는 쪽을 선택했다.

새우등…아니 캐나다 구스 터진다. 출처: 캐나다구스

이제 막 중국 최대 쇼핑몰 알리바바 그룹 톈마오에 플래그 샵을 내고, 홍콩에 오프라인 매장을 하나 만든 캐나다 구스는 결국 내륙 시장 교두보로 여겼던 ‘내륙 1호점’ 베이징 매장을 15일 오픈하려다가 기약 없이 연기하기로 했다.

전부 정리하고 나가버려도 되지만, 또 중국 시장을 포기한다는 게 쉬운 문제는 아니다. 참 답답한 일이다. 중국의 치졸함은 사드갈등부터 지금껏 유지되는 한한령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중국은 전형적인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강약약강의 국가다. 자신의 이익과 자존심을 건드리면 못 참는다. 물론 미국이라는 ‘마동석 국가’가 건들면 분노가 자동으로 조절되긴 하지만 말이다. 사드 때도 그렇고 이번 사안에도 마찬가지로 배후는 미국이지만 언제나 당하는 건 약소국들이다.

분노 조절해 드립니다

우리는 이런 유치 뽕짝인 나라 옆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가? 치졸하기로 따지면 미국이 중국에 질 리가 없으니 말이다. 결국 다 거기서 거기고, 국제정치는 그냥 동물의 왕국, 아무리 고상한 척 해봐야 노골적인 약육강식일 뿐이다. 국제부 일을 계속하며 내린 국제정치에 대한 정의다.

지난해 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암살당했을 때 말레이시아가 유력 용의자를 석방하지 않는다며 주북한 말레이시아 외교관들을 인질로 잡았던 일이 있다. ‘인질 외교 마스터’ 북한과 미·중 양국의 행태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한쪽은 멍 부회장을 잡고, 한쪽은 캐나디안 두 명을 잡았다. 당시 고매한 척 북한은 쓰레기라고 떠들던 미국, 유럽 언론들은 어떤 평론을 내놓고 있나. 다 껍데기뿐인 가식 덩이들이다. 내로남불인 것이다.

너무 냉혹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게 우리가 신봉하고 맹종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 아닌가. 돈있는 놈이 짱이고, 힘 센 놈이 독식하는 아름다운 세상이지 않나. 국제정치나 시장논리나 그냥 세상을 뒤엎지 않는다면 참고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만국의 약소국이여, 단결하라. 외치던가. 으휴. 약소국에 태어나 이게 무슨 꼴인가. 하지 말고 우리도 치졸하게 구는 구석이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원문: 돼지터리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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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행복할 때 나는 최악을 생각한다 https://www.ppss.kr/archives/181221 Thu, 27 Dec 2018 07:37:12 +0000 http://3.36.87.144/?p=181221

‘상한가’

SNS 글쓰기를 시작하고 난 뒤 내 생활은 소위 상한가를 치고 있다. 무슨 팔자에 없는 방송 출연에 심사위원에 경이로운 일이 지속되는데, 으레 그렇듯 못된 버릇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불안증’

지난한 삶을 살면서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은 타고난 낙천성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차악의 솔루션을 생각한다. 온몸에 멍이 들고 상처가 나 피가 뚝뚝 떨어져도 한 점만 바라보고 묵묵히 걷는 끈기. 거기에 아무리 많은 생채기가 나도 ‘별거 아닌데?’하고 넘기는 낙천성은 나를 살게 해준 원동력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다 잘 될 거야’라는 말로 온통 뇌를 채워 버리기 때문에 가능한 낙천적 최면 상태랄까.

문제는 역의 상황에서도 이런 성질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미칠 듯이 행복하고 더할 나위가 없이 좋을 때 항시 최악을 생각한다. 전주로 내려와 집 안을 추슬렀을 때 이 불안증이 돋았고, 몸이 아팠다. 몸이 좋아지고, 기자 일이 손에 붙었을 때 갑자기 공황증이 찾아왔다. 어디론가 떠나야지 하고 베이징에 왔는데 김정남이 죽고, 사드가 터지고, 트럼프가 오고, 김정은도 3번이나 베이징에 오고, 사람이 갑자기 하나 줄면서 혼돈의 아노미를 맞았다.

돌고 돌아, 요즘. 너무 일이 잘되고 좋은데 마음 한쪽에서 몹쓸 불안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동요 없이 잘 버텨내는 나는 감사하고, 어여쁘기까지 하다. 반대로, 좋은 일이 있을 때 제대로 즐길 줄 모르고 불안해하는 나는 꼴도 보기가 싫다.

그래서 ‘자랑교’의 교지를 생각하며, 또 「어른은 어떻게 돼」 박철현 작가님을 생각하며 자랑을 해봤다. 음. 어색하고 좋은데? 라는 생각과 집어치우자는 생각이 들었다. 안 어울려. 몸에 안 맞아. 그만하자. 양화대교 같다.

 

문득, 엄마 이야기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데 엄마가 떠오르는 것이 기분이 이상하다. 엄마는 돈이 없을 때, 그러니까 극도로 돈이 없을 때 묘한 재주를 발휘해 집 안을 이끌어 왔다. 일례로 1997년 가을 IMF가 조선반도를 뒤덮었을 때였다. 우리 집은 어김없이 아버지의 실직을 맞았다. 사실 원래 별로 바깥 일을 안 하시기 때문에 실직에 따른 큰 충격은 없었지만, 문제는 은행 빚이었다.

다행히(?) 당시 온갖 사업체가 부도를 겪으면서 땡처리하는 물건들이 시장에 쏟아졌다. 때문에 생필품 가격이 내려가 우리 집 생활비는 오히려 줄었다. 하지만, 20% 후반대까지 치솟은 은행 이자는 카드 돌려막기로 살아가는 우리 집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당시 우리는 엄마의 수입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고, 엄마의 월급은 부업 포함 70~80만 원 선에 불과했다. IMF의 후폭풍이 거세게 불던 98년에 나는 막 고딩이 됐었다. 누나도 지역 국립대에 입학해 새내기 생활을 시작했던 때다.

기본적으로 매달 나가야 하는 돈만 세어 봐도 카드이자 30만 원, 집세 17만 원, 누나나 내 용돈 13만 원 등이 필수로 빠져나갔다. 거기에 누나와 내 등록금을 별도로 마련해야 하고, 그 나머지로 살림을 꾸려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4인 가정에 20만 원으로 생활이 가능하긴 한 건가? 혹여 지인의 경조사라도 생기면 흰 봉투를 앞에 두고 고뇌하던 엄마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반대로, 지금 엄마는 빚도 없고, 생활비도 넉넉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내가 있으므로 재정에 여유가 좀 생겼다. 말 그대로 흑자 재정. 이런 상황에 놓이니 어떻게 하실 줄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여행만 주야장천 다니시는 걸까?

엄마는 주변에서 누가 돈이 급하다면 빌려주기 급급하고, 심지어 나한테 꿔다가 빌려주기까지 한다. 한번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짜증을 낸 적이 있다. 말 수가 워낙 없는 양반이라 대꾸는 안 하셨다. 돌이켜 생각하니 옛 생각이 나서 그러시는 거 같기도 해서 짠하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다.

 

괜찮다, 나누면 된다

다시 돌아와 요즘 너무 행복에 겨워 사는 입장에서 이 넘치는 행복을 어떻게 해야 하나 감당을 못하는 나를 보면서 엄마를 벤치마킹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넘치면 나누면 된다. 나누다 보면 좀 나눔이 부족하게 되니까. 어디서 빌려다가 나누겠지? 그러면 나는 또 ‘마이너스’. 마이너스는 내 주특기 아닌가. 그럼 또 채우고, 넘치고, 다시 퍼주고, 부족하면 다시 채우고, 이렇게 선순환시킨다.


생각해보니 찢어지게 가난한 순간을 넘어섰을 때부터 엄마는 남을 도우셨던 거 같다. 내가 삼수를 마치고 집 빚을 다 털고 상경을 앞뒀을 무렵이니 2005년쯤부터 시작됐을 거다. 지금은 내가 다 건네받아 살을 붙인다고 붙였지만, 당시 엄마만큼 대범하게는 못하는 꼴이니 새삼 엄마의 대범함에 경외감을 금치 못하겠다.

현인은 보통 저기 TV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경우가 많다. 행복이 넘쳐서 부담스러우면 바가지로 휙휙 텀벙 첨벙 퍼내 버리자. 불안증이 시원~하게 가셔버리게. 변태같고 좋은데?

원문: 돼지터리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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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좀 그만합시다! 좀! https://www.ppss.kr/archives/181219 Thu, 06 Dec 2018 02:03:03 +0000 http://3.36.87.144/?p=181219
출처: 미디어오늘

요즘 어느 유명 언론사 손녀의 갑질 논란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어디 저~먼 나라 이야기 같지만, 갑질은 언제 어디서 도적같이 우리에게 찾아올지도 모른다.

기자를 하면서 가장 좋은 게 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가장 먼저 꼽는 게 갑질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갑질하는 사람을 골탕 먹일 수 있다는 점을 꼽겠다.

엥? 기사 써서 가능?

노. 아니다. 기사를 그렇게 막 쓸 수는 없다. 대신 다른 방법이 있다. 오늘은 내가 기자 생활을 하면서 목도하고, 관찰하고, 맞닥뜨렸던 갑질에 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갑질 순환 역사에 대한 단상

최근 학부모 모임에서 크게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바로 ‘갑질’. 아니 무슨 갑질이 있길래 화제씩이나 되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럴만한 일이었다. A 대기업 주재원이 저지른 갑질인데 내용을 들어보니 기가 찬다.

A 기업 주재원 D는 올해 30대 초중반이다. 이제 막 주재원으로 부임했고, 주요 업무는 협력업체 관리 및 품질 관리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갑질 문화야 베이징에서 잔뼈가 굵은 협력업체들이 어느 정도 다들 감수하는 편이라 웬만해서는 크게 이슈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이 D란 놈이 저지른 만행은 화를 거의 안 내는 내가 봐도 전두엽이 저려올 만큼 스펙타클했다.

일단 직접 확인한 만행만 적어 보면, 협력업체에서 제품을 납품하면 원청에서는 불량 검사라는 것을 하게 된다. 제조업체 종사자라면 익숙한 이 과정에서 1차 갑질이 발생했다. D는 협력업체가 가져온 제품에 불량이 발생할 경우 ‘어디 어디 문제 개선 요망’이라고 적어 제품을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오함마를 가지고 물건을 때려 부순다(이거 내가 봤음).

진짜냐고? 그렇다. 진짜 때려 부수고 있었다. 사실 이거 재물손괴에 해당한다. ‘슈퍼 을’인 협력업체가 신고한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을인 게 죄라고 찍소리도 못하는 협력업체 납품 담당 직원은 오함마에 만신창이가 된 제품을 주섬주섬 챙겨 회사로 돌아가면서 얼마나 자괴감이 들겠나. 그날 저녁 ‘처자식만 아니면 저 자식을 그냥’ 하며 술로 쓰린 속을 달랠 거다. 아. 상상도 하기 싫다.

2차 갑질은 더 진화한 형태다. 이 D란 놈은 나이가 어린 편이다. 30대 초중반이라고 했으니 연줄이 좋은 은수저라고 해도 잘 해봐야 차장 정도다. 일반인이면 잘해야 과장, 아니면 고참 대리 정도 됐을 거다. 오너 일가는 현장에 안 나갈 테니 논외로 하자. 그런데 D가 상대하는 협력업체 담당자들의 나이는 적다고 해야 40대 중후반, 책임자급은 50대 초중반이다. 나이 차가 많게는 20살 넘게 차이 난다.

뭐 나이가 깡패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의 기본 됨됨이만 생각해봐도 아버지 같은 분을 앞에 다 불러 놓고, 고함을 치고, 물건을 때려 부수는 저 행위가 이해가 가나? 내가 그 집 아들이었으면 당장 오함마 들고 쫓아가서 너 죽고, 나 죽고 했을 텐데 당하는 분도 아들 걱정 끼칠까 봐 말도 못 꺼내셨을 거다.

D의 3차 갑질은 더 집요하고 쪼잔하다. D에게 당하고, 당하고, 당하던 한 업체 중진급 간부가 한번은 분기가 탱천해 참지 못하고, 한소리 했다고 한다.

거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오. 이러는 법이 어딨소.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말끝을 흐리며, 정신 돌아옴)

이 이야기를 들은 D는 당연히 노발대발하며 그 협력업체 대표를 소환했다. 무슨 큰 죄라도 진 양 대표는 가서 사정사정을 했고, 화는 냈지만 뒷일 수습이 걱정됐던 중진급 간부는 더 큰 죄라도 진 거처럼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며 형벌이 내려지기를 기다렸을 테다. 결과는 D의 강력한 요구에 이 간부는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리고 이상한 자리로 인사가 나고, 자연스럽게 퇴직 수순을 밟았다.

그럼 D는 신변에 아무런 변화가 없단 말인가? 응. 없다. 어쩌면 협력업체 잡도리를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D에 대한 소문은 좁은 교민 사회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협력업체들은 부글부글 속을 끓였지만, 그렇다고 저 D 하나 처단하자고 밥줄을 걸 순 없지 않은가. 결국 다들 참고, 참고, 또 참는 중이라고 한다.

 

갑질 3연타 대처법

이 이야기로만 전해 듣는데도 몸이 부르르 떨리고, 뒷목이 뻐근하니 없던 정의감이 다 불타 흐른다. 이 이야기를 해준 쪽에서는 기사는 절대 안 된다며 신신당부를 하는 통에 일단은 함구하기로 했다. 기자를 하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내가 정의다’라는 마음가짐이다.

실제로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을 듣고 기사를 쓰거나 분노했다가는 기사가 엉망이 되고 낭패를 보는 일이 많다. 또 이로 인해 뜻하지 않게 억울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내 생각이 맞는지 그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사안에 대한 접근은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물론 D의 경우는 이미 검증이 끝났을 정도로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럼 이렇게 배알이 꼴리는 대로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이런 경우 기사로 조지는 것보다 소프트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다. 교민 사회는 굉장히 좁은 커뮤니티를 가졌다. 고로 소문이 빨리 퍼진다. D란 놈의 갑질을 멈추게 하고 싶다. 미치도록 하고 싶다. 그렇다고 D의 밥줄을 아예 끊어버릴 만큼 일을 벌이는 것은 또 안될 일이다. 행여나 D가 줄줄이 딸린 처자식이 있고, 건사해야 할 식구가 있다면 어쩌겠는가.

일단 이런 경우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대사관에서 기업 관리를 담당하는 외교관들에게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 들었어요?’를 시전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뒷이야기는 갑과 을 어느 쪽도 특정되지 않게 조심조심 변죽을 울리는 식으로 덧붙인다. 이렇게만 하면 끝날까? 아니다. 외교관들은 의외로 무지 바쁘다. 그사이 을의 고통은 계속된다. 다음 단계로 신속히 들어가야 한다.

소문의 씨앗을 맨 꼭대기에 심었으면, 이제 옆자리에도 심어야 한다. 우선 D의 회사가 아닌 동족 업계 고위급 인사를 만난다. 그런 다음 이렇게 말하면 된다. ‘아 글쎄, 요새도 이런 일이 있네요’. 그럼 이 인사가 ‘어. 나도 들었어요’ 하면 위에 뿌린 씨앗이 잘 퍼지는 것이니 안심하면 된다.

‘아. 그래요?’ 하면 씨앗을 더 확확 뿌려 줘야 한다. ‘혹시… 선생님네 회사 이야긴데 제가 실수한 건가요?’ 하며 거름을 확 뿌리는 거다. 그러면 다음 날쯤이면 대충 D의 정체가 업계에 퍼지게 돼 있다. 그런데도 눈치 없는 D가 계속해서 갑질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뭐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마침 딱 소문이 퍼지기 좋은 연말이다. 각종 송년회가 난무하는 때라는 뜻이다. 사실 조만간 D네 회사 송년회가 잡혀 있다. 송년회 자리에 가면 이때는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술을 들고 테이블을 도는 D네 회사 최종 보스가 우리 테이블에 왔을 때, ‘아니. 글쎄 그런 소문이 돌던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라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이 회사 조직문화상 최종 보스가 저 이야기를 들었으면, 다음날 모든 직원이 일렬종대로 서서 보스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고해성사해야 할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색출작업이 끝날 수도 있다.

 

그럼 어떻게 되나요

높은 확률로 D는 잘리지 않는 선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작업은 굉장히 공을 들인 것이고, 사실 이 정도로 확실하게 팩트 확인이 된 상황이면, 제보자가 결심만 해주면 기사가 나가고 D는 회사를 즉시 그만둬야 할 수도 있다. 그런 데 그리하면 제보자의 회사도 파탄이 나니 이 방법은 쉽지 않은 방법이다.

D가 사라져 이제 속이 시원한가?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문제가 뭐냐면, D에게 갑질을 당한 우리의 ‘슈퍼 을’들도 정도만 다를 뿐 D와 똑같이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에게 그대로 을질을 한다는 것이다. 이 지독한 갑질 순환의 역사여. 이제는 좀 바꿔보자.

원문: 김진방 돼지터리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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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어른’을 만난 것에 대한 단상 https://www.ppss.kr/archives/179216 https://www.ppss.kr/archives/179216#respond Wed, 07 Nov 2018 09:58:42 +0000 http://3.36.87.144/?p=179216
‘어쩌다 어른’이 넘치는 시대

요즘 어른이란 단어가 자꾸 눈에 띈다. 내가 어른 될 나이가 된 건지, 아니면 어른다운 어른을 만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오늘은 내가 아는 한 어른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어제 우리 사무실 바로 전의 대장님께서 중국 측이 주최하는 포럼 참석차 베이징에 오셨다. 지금 1진 선배도 훌륭하지만, 진짜 이런 분이 선배인 게 자랑스러울 정도로 마음도 선하시고 바르신 분이다. 내가 나중에 어떤 어른이 될까 고민해 본다면 가장 롤모델에 가까운 분 아닐까 싶다.

이 선배는 말투부터 행동, 태도, 삶의 자세까지 어느 하나 모나지 않다. 아래 사람도 깔보지 않으신다. 입은 무거우신데 무게를 잡지도 않고, 말이 아예 없지도 않다. 그리고 입보다는 지갑을 시원하게 여시는 스타일이다. 베이징 특파원들은 임기를 마치고 귀임할 때 회사에 상관 없이 동료 중 한 명이 송별사를 써 준다. 그때 다른 회사 선배가 썼던 송별사 글귀가 아직도 생각이 난다.

항상 공손히 두 손을 앞으로 모으시는 선배, 선배를 생각하면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망울과 겸손하고 매너 있는 태도, 그리고 조금도 망설임 없이 여는 지갑이 생각납니다.

자꾸 지갑, 지갑 하니 돈이 많아 흥청망청 쓰시는 분 같아 보이겠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다.

출처: 게티이미지

나는 이 선배와 함께 1년여 남짓을 함께 지냈다. 우리는 중국의 차량 5부제 때문에 회사 차를 운행하지 못하는 날마다 같이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 나와 1진 선배는 이 선배가 계시는 동안 단 한 번도 택시비를 내 본 적이 없다. 한 번은 우리가 택시비를 내려고 했다가 그 온화한 얼굴로 혼이 난 적도 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부임하신 선배는 귀임하실 때 후임이 정해지지 않은 채 우리 둘을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정말 안타깝고 미안해 하셨다. 한국에 가신 후에도 우리 둘이 ‘김정은 3연방 방중’같이 큰 일거리를 만나 전전긍긍할 때면 죄인이라도 된 마냥 메시지를 보내 사무실 상황은 어떤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시곤 했다. 그런 분을 우리 모두 존경했다. 우리 뿐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회식 때면 영상통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 정도로, 우리 사무실 전체가 따르던 그런 어른이었다.

어쨌든 어제는 거의 8개월 만에 나와 1진 선배와 재회한 것이었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외부 손님이 낀 1차 자리가 끝났을 때 우리는 한 잔만 더 하자고 선배를 붙잡았다. 손을 내저으시는 선배에게 커피라도 마시자고 사정했지만, 선배는 우리가 내일도 일을 해야 하고 본인도 피곤하니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끝끝내 뿌리치셨다. 고작 9시였는데 말이다.

사실 그분의 평소 소신이 그렇다. 처음 내가 베이징에 왔을 때 우리 회사 임원진 전체가 약속이나 한 듯 순서대로 돌아가며 베이징을 방문했고, 그 중 몇몇은 우리를 1, 2, 3, 4차 술자리까지 끌고 다니며 말 그대로 ‘술고문’을 했다. 당시만 해도 사드 정국이 한창이었던 데다 1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둬서 몹시 바쁠 때였는데도 출장의 흥에 취한 그들은 그리했던 것이다. 그때 함께 술자리를 돈 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선배는 조용히 말했다.

뭐 바쁜 애들 붙잡고 저럴까 몰라. 왔으면 그냥 조용히 있다 가지. 정 아쉬우면 호텔 로비로 불러 커피나 한 잔 사주고, 금일봉이나 주고 가면 될 것을, 참.

사람이 말은 쉽게 뱉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지키기는 정말 쉽지 않다. 나 역시도 ‘이 선배가 과연 그때 하신 말을 지킬까’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내 일말의 의구심이 부끄러울 정도로 역시는 역시였다.

어제 오후 4시 30분 하이난발 베이징행 항공편으로 일행과 함께 베이징에 도착한 선배를 우리는 회사 차로 직접 모시고 싶었다. 어차피 어제는 내가 공항에서 일했기 때문에, 잠시만 대기하면 큰 수고 할 것도 없는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선배는 절대 기다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일행과 함께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겠노라 고집을 피우시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맑고 온화한 선배의 얼굴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 사람의 삶은 얼굴에 새겨진다고 나는 믿는다.

 

선배, 같이 저녁 먹어요, 오늘은 꼭

우리는 오늘 선배의 마지막 일정인 인민대회당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이모님의 밥상을 준비해 두고 선배를 모셔 오기로 했다. 평소 좋아하셨던 보이차도 1진 선배가 몰래 준비해두셨다. 나는 베이징 특파원계 운전사답게 일정이 끝나기를 기다려 부리나케 모셔올 생각이다. 분명 인민대회당 앞에서 안 가려는 선배와 모시려는 내가 옥신각신 기분 좋은 실랑이를 해야 할 것이다. 나도 나중에 이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후배들이 모시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로 그리운 어른 말이다.

선배, 선배 계실 때 매일 함께 LG쌍둥이빌딩 지하에서 아침 먹던 일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선배 가시고는 그 식당에서 아침을 한 번도 안 먹었어요. 식당 카드도 보증금 환급 안 받고 책상 서랍에 기념으로 잘 간직하고 있어요. 아침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제 고민도 들어주셔서 감사했어요. 20년 가까이 차이나는 후배인데 말이에요.

내가 타는 똥차 위험하다며 한국 돌아가신 후의 본인 자리 부탁은 안 하시고 사무실 차 바꿔달라고 하신 것도 너무 감사해요. 언행일치 안 하셔도 좋으니까 오늘은 꼭 같이 점심, 저녁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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