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교육관이라면, 사실 ‘교육’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헤지펀드 매니저 브루스 코브너는 트레이딩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가르칠 수는 없다. 하지만 배울 수는 있는 것 같다.

배운다는 것, 학습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이다. 게임에 빠져드는 것, 음악에 심취하는 것, 책에 젖어 드는 것, 모두 개인의 흥미가 콘텐츠와 만나서 뇌가 적극적으로 몰입하게 된 활동이다. 그때 비로소 생각이 콘텐츠와 ‘반죽’이 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 반죽 안에서 급격한 화학 작용이 발생한다. 그렇게 놀아본 게임, 심취해 본 음악, 젖어든 책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고 머릿속 깊은 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나간다. 단 한 줄의 시를 읽어도 그러하다.
반면 교육은 이러한 작용을 외부에서 강제로, 혹은 반자동적으로 만드는 하나의 영역이다. 중요한 것은 그 반죽의 숙성에 있고, 흥미와 콘텐츠의 융합에 있지 교육을 하는 ‘행위’에 있지 않다. 말을 물에 데려가더라도 어떨 땐 마시고 어떨 땐 마시지 않으리라. 소귀에 경을 읽는 행위를 열 번 하고 체크리스트에 열 번의 체크를 한다고 해서 교육이라 부를 순 없을 것이다.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이 좋은 ‘교육’이다. 즉, 즐거운 학습이라는 것이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좋은 교육의 유일한 목표이다.
2.
그러나 성인들도 그러하듯,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뛰어드는 영역이라는 것은 지극히 우발적이어서 통제하기 어렵다. 뛰어난 인재들도 사내 교육 영상을 틀어놓는 획일화된 교육에는 진절머리를 느낀다. 그러나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들어간 취미 동호회 게시판에서 몇 시간 동안 자발적 학습을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라는 이름이 붙은 교육은 대체로 지겹고 비효율적이며 심지어 비합리적인 과정이기 쉽다. 교육자의 편의에 맞춰져 있거나, 이미 학생들이 교육에 엄청난 열의를 가지고 있음을 가정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학생이라면 공부를 해야지!’라며 강제적 교육을 할 때는, 그 학생이 이미 공부에 목숨을 건 어떤 계기가 있었을 때에만 합리적인 방법이다.
교육의 올바른 접근은 ‘배우도록 돕다’이다. 배우도록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재밌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 점은 유튜버들이 이미 증명한 것 같다. 호기심을 갖도록 썸네일을 던져주고, 직접 파헤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 그리고 성인 교육이 그러하듯, 중간에 졸리거나 관심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배려해 주고 존중해 줘야 한다. 원래 배운다는 것은 머리가 아프고 당이 떨어지는 일이다.
3.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제일 좋은 교육은 첫째로 학습에 대한 습관이 들게 하는 것이다. 장기간 무엇을 탐구하고 배우고 익히고 가지고 노는 그 몰입의 시간이 몸에 배게 해야 한다. 그 몰입력은 근육과 같아서, 갖추지 못한 사람은 평생 계발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단기적인 교육 성과의 기준을 ‘몰입 시간의 극대화’라고 해보자. 교육자가 몰입 시간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성과와 보상을 받는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아이들에게 재미없는 학습 과정을 시간을 딱딱 잘라 이렇게 주입했다가 저렇게 주입했다가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회의감이 느껴질 것이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몰입 시간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일을 찾는 것으로 이어진다. 다른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정신적 균형 같은 것은 나중 일이고, 우선 푹 빠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한 시간, 가급적 두 시간 이상씩 몰입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장려하면 된다.
게임이나 영화, 영상은 이런 분야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심지어 이 분야들이 정신에 해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프로 게이머, 영화감독, 영상 분석가들은 모두 정신병 치료를 받아야 맞다. 그러나 딱히 그런 트렌드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건희 회장은 영상으로 많이 공부했다고 한다. 주치의가 말렸어야 할까? 일론 머스크나 제프 베조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등은 모두 어릴 때 컴퓨터에 빠져 있었을 텐데 이들만이 그 중독에서 생존한 기적적 케이스라고 봐야 할까? 아니다.
요는 게임이 문제가 아니라, 게임의 즐거움을 대화하고 나누고 곱씹을 인간적 대상이 없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하루 종일 공을 차거나 피겨 스케이팅을 한다고 해서 교육적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강압적으로, 혹은 고립적으로 했을 때 문제가 된다.

4.
어린 나이에 몰입력이 계발되면 학습할 수 있는 영역이 상상 이상으로 참 많다. 한번 몰입이라는 근육이 생겨난다면, 대체로 새로운 학습에 대해서 역량이 커지는 셈이다. 몰입을 방해하는 온갖 ‘교육적’ 요소들을 디자인하는 것보다, 몰입을 할 수 있는 요소를 만들어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중요한 것은 죄책감을 주지 않는 것이다. 비만이나 흡연, 음주, 도박, 낭비 등의 문제 중 하나가 타인들이 쉽사리 비난하여 죄책감을 준다는 논문 속 주장을 읽었는데, 그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다시 중독되어 있는 영역으로 도피하기 쉽다는 것이다. 위의 행위들을 그럼 장려하라는 참이냐?! 고 물을 수 있는데, 내 얘기인즉슨 진지한 대화와 공감이 대체로 비난보다 훨씬 효율적인 무기라는 것이다.
“아직도 게임이나 하고 있어!”라고 외친다면, 그건 마치 여러분에게 “오늘도 술이나 먹고 있어?” “오늘도 커피 먹고 수다나 쳐 하고 앉아 있었어?” “오늘도 인터넷이나 하고 앉아 있었어?”라고 끝없이 다그치는 것과 비슷한 효과일 것이다. 정녕 이 방법이 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재벌 회장들과 대통령 옆에도 이런 비난꾼을 고용해서 앉혀놓을 일이고, 잔소리꾼 상사들의 연봉을 수직 인상 시켜주면 회사가 잘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허망한 생각이 아닌가.

그럼에도, 아이들이 만화책이나 영상, 게임 등을 하는 시간을 ‘교육적이지 않다’라며 비난하면 어떤 효과가 발생할까? 죄책감이 생기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 더 좋은 사람이 될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극히 드물 것이라는 점이 현실이다. 나쁜 콘텐츠는 피하도록 도와주되, 오히려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주제로 끌고 나와야 한다. 그렇다면 그마저도 모두 건전한 ‘학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영화에 미쳐서 어쩌면 인류 중에서 영화에 관해 가장 해박한 지식을 ‘학습’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께서 성인 등급의 영화까지 다 보여줬다는 얘기에 충격을 받았다. 이 충격을 아이들을 키우는 지난 11년간 곱씹어 봤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을까? 과연 좋은 영향을 줄까? 타란티노는 애초에 미친놈 아닐까? 혹은 천재여서 그러진 않았을까?
어쨌건 그의 영화에 대한 집념은 주위에서 장려를 받았고, 그는 그 집념을 키워나가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타란티노의 이야기가 울림이 있는 것은, 누구라도 자신이 집념하는 영역을 어려서부터 5년 10년간 애정 해 올 기회만 된다면, 자신의 오타쿠적 관심사로 먹고 살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타란티노 영화가 지나치게 자극적이라 주장한다면 그 또한 동의한다. 성인 등급 영화는 유치원생의 정신 발달에 지나친 수준의 자극은 아니었을까 싶긴 하다.
어쨌든, 달리 말하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그런 오타쿠적 관심사를 접고 인류 보편적 교육으로 교환해야 한다면, 대체로 경제적 이득은 매우 적은 행위일 것이다. 더욱이 집중력을 키울 기회마저 잃을 테니 더욱 그렇다.
5.
아이들의 머리는 24시간 돌아간다. 책을 한 권 읽으면, 그 내용을 한번 복기할지 1500번 복기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강제로 읽힌 책은 필시 한 번도 복기 안 할 것이고, 스스로 읽은 책 중에는 한 번쯤 백번 천번 복기하는 책이 나올 것이다.
주입한 지식의 시대는 간 지 오래다. 스스로 소화해 내고 학습해 낸 내용들의 총량이 사람의 지성을 결정한다. 공교육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으리라. 교과 내용이 후지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으리라. 그러나 획일화된 프로세스를 우선시해서 단기적인 입시 따위에 아이를 껴 맞추기 시작하면, 그 대가로 지성과 깊이를 잃고, 또한 경제적 기회까지 잃는 시대가 되었다.
교육이 그만큼 중요하다. 아니, 학습에 대한 주변 어른들의 철학이 그만큼 중요하다.
원문: 두물머리 천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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