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시간 (Adolescence, 2025)
해답 없는 문제를 마주하는 태도

저녁 식사 시간이었나, 흔한 예능 프로의 마지막에서나 나올 법한 질문을 아내에게 들었다.
현재 꿈이 뭐야?
어렸을 때 같으면 뭐가 되겠다는 꿈을 얘기했겠지만, 아이를 키우면서부터 내 꿈(목표)은 아이에 관한 것이 될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큰 고민 없이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아이가 큰 문제 없이 학창 시절을 잘 마무리하는 것뿐이야.
내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결코 쉽지 않았다. 아니 누군가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갈래?’라는 비현실적 질문을 던져도 나는 ‘아니, 결코 돌아가지 않을 거야’라는 현실적 답변을 할 것이다.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과연 내가 그걸 다시 할 수 있을까?
내 학창시절은 여러 이유로 복잡하고 힘겨웠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딱히 어떠한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는다. 내 경우에는 ‘어떻게 고통을 견뎌냈지?’라는 의문보다는 ‘그럼에도 왜 삐뚤어지지 않았지?’라는 의문이 더 앞설 정도로,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혹독한 시간을 견뎌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조금 특이한 경우였을지 모르나, 모두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각자의 이유들로 쉽지 않은 시간들이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내 아이가 커다란 사건이나 힘겨움 없이 이 시기를 잘 보내는 것이 언제부턴가 목표가 됐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 (Adolescence, 2025)〉은 힘겨운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제이미라는 한 소년과 그가 연루된 사건을 배경으로 한 범죄·사회 드라마다(원제인 ‘Adolescence’는 청소년기라는 다소 형식적이고 담백한 제목인데, ‘소년의 시간’이라는 우리말 제목에는 좀 더 많은 복잡한 의미를 담았다). 총 4회 분량의 비교적 짧은 드라마인데, 편당 약 50~60분 정도로 편성되어 4편으로 나뉜 드라마라기보다는 1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이 드라마를 얘기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원테이크 촬영이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컷을 끊지 않고 진행되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많은 준비가 필요한 작업이다. 보통은 액션 영화에서 현장감을 배가 시키기 위해 사용되지만, 감정이 주가 되는 드라마에서도 원테이크 촬영이 얼마나 효과적인 기법인지 〈소년의 시간〉을 보면 알 수 있다.
원테이크 촬영이다 보니 촬영 장소가 한정적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한정된 공간 내에서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가끔은 제3자가 되어 해당 공간의 분위기를 한발 물러나 전체적인 시점으로 볼 수도 있고, 가끔은 극 중 공감대를 느끼게 되는 인물(상담사나 제이미의 아버지 등)이 느끼는 감정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현실처럼 체험하게 된다.
이 드라마가 다루는 감정이 매우 격렬하게 요동치다 보니,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전달자 역할을 하고 있는 원테이크 촬영 방식은 여느 액션 영화의 그것 못지않게 효과적이다.
(이후에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총 4개의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3편과 4편이다. 먼저 3편에서는 시설에 구금되어 있는 제이미가 심리상담사와 긴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담겼다. 이 에피소드는 거의 이 대화가(이걸 대화라고 할 수 있을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긴 시퀀스를 통해 〈소년의 시간〉이 보여주고자 했던 현재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시퀀스에서는 흔히 ‘인셀’이라고 하는 현재 10대 남자들의 민낯을 피하고 않고 들춰낸다. 이들이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삐뚤어진 가치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어긋난 시선을 극 중 제이미의 대사와 태도로 담아내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판타지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현재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문제가(갈등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심화되고 있는 10대 남자들의 어긋난 가치관이 얼마나 정상적인 것과 거리가 있는지, 그 폭력성이 어디까지 닿아있는지 이 작품은 상세히 보여주는 것에 그친다.
다음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세히 말하겠지만, ‘보여주는 것에 그친다’는 것은 이 작품의 중요한 미덕이다. 특히 어쩌면 수많은 범죄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소년의 어긋난 정체성과 사회성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소년의 시간’은 섣불리 결론짓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현재 사회에는 더 선행되어야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이미의 행동이나 언행에 대해 작품 스스로가 결론짓지도, 교정하지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시청자는 이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 주변을 다시 둘러보게 된다. 아주 복잡해진 마음으로 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4번째 에피소드였다. 4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제이미의 아버지인 에디(스티븐 그레이엄)의 생일날 벌어지는 일들을 담는다. 3번째 에피소드에서 제이미의 현실을 마주했다면, 4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당사자이자 제3자이기도 한 가족, 더 직접적으로 제이미를 낳고 길러낸 부모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이 에피소드 역시 차로 이동하는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에디와 아내, 그리고 딸의 대화로 이뤄져 있다. 나는 이 에피소드 속 대화 한 줄 한 줄을 보면서 〈소년의 시간〉 작가와 제작진들이 얼마나 이 현실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조심스레 접근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라면 제이미 부모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말들과 감정들로 여과 없이 담아내는데, 내 분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이기도 한 자녀라는 존재. 그 자녀를 상대로 한 원초적인 감정들부터 부모로서 느끼게 되는 무기력함과 죄책감까지 그 꾹 눌린 답답함을 가감 없이 마주한다.
가장 가슴 아팠던 건 대화의 말미에 너무 어른스럽고 잘 자란 딸아이를 보며 에디가 묻는 장면이다.
우리가 저 애를 어떻게 저런 애로 만들었지?
그러자 아내가 대답한다.
제이미와 똑같은 방법으로.
이 대답을 듣고 에디는 하루 종일(어쩌면 처음 사건이 있던 날 이후로 쭉) 억눌러 왔던 감정이 폭발하며 오열한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 똑같은 방법으로 자녀들을 키웠는데, 제이미와 누나는 너무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극 중 제이미처럼 청소년들이 인셀이 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어른과 사회는 쉽게 원인을 규정짓곤 한다. 부모가 가정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거나, 학교, 사회 등의 만연한 문제들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소년의 시간’에서도 제이미가 다니고 있는 학교를 보면 여러 문제들이 해결책 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학교에 다니는 모든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닌 것처럼, 똑같은 부모의 똑같은 방법으로도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결론짓지 않는 이 작품의 유일한 결론이자 희망이다.

글의 서두로 돌아가 내 아이가 큰 문제 없이 학창 시절을 마무리하길 바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처음엔 부모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나쁜 것들로부터 접촉을 막아 내면 끝까지 괜찮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터넷을 모두 끊고 사회에서 벗어나 우리 가족만 고립되어 어른이 될 때까지 지낼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이의 학교, 사회생활은 부모가 아무리 관심을 가져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그저 미뤄 짐작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끝까지 몰랐으면 하는 나쁜 것들, 끝까지 접할 일이 없었으면 하는 나쁜 일들을 부모가 영원히 막아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 결국 결론은 그런 나쁜 것들을 아이가 독립적으로 판단하여 스스로 거르고 피하거나 이겨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이른다. 쉽게 말해 다소 공허할 수도 있지만 아이가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말고는 나쁜 것들의 유혹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부모의 힘만으로 막아낼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이야기다.
이 결론밖에는 없다는 것이 매번 불안하고 무력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할 수 있어!’라고 쉬이 결론짓는 이야기보다 ‘소년의 시간’처럼 그 무기력함을 뼛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것으로 위로하는 이야기가 더 치명적으로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원문: 아쉬타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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