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갈 때쯤 이직에 대한 상담이 많이 옵니다. 최근에는 입사지원서 혹은 자기소개서의 형태로도 많이 들어오는 이런 편지들을 읽으며 대견한 후배들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언제쯤 우리도 저런 인재들을 마음껏 뽑을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한 분이 쓴 긴 편지의 끝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울분을 토해내듯 글을 썼습니다. 그것은 제 지난 삶에 대한 후회이기도, 제 무능함에 대한 분노이기도, 제가 품은 꿈에 대한 간절함 이기도 합니다."
아마 30세를 전후한 분들은 많이 공감하실 내용인 것 같습니다. 어느 모임에 나갔더니 젊은 대표님께서 제 글을 지인들과 함께 돌려 읽기도 한다고 하시더군요. 30대 전후의 갑갑함에 많은 위로가 된다며 두 번 세 번 반가움을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30대 전후의 갑갑함에 관심을 가지는 선배가 별로 없기 때문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도 제가 가장 갑갑했으니까요.

여러분은 그 어느 때보다 재능이 뛰어났고, 다양한 문물을 경험하였고, 다양한 세대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들었던 세대입니다. 인터넷이나 게임에 접속만 하면 또래와 지역을 초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머릿속에 쌓인 무의식의 원석은 그 누구보다 많은 세대입니다.
특히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친구들은 나름 대한민국에서 뜻 있고 생각 있고 조명을 받았던 젊은이들일 테니 그런 지적 섭취에 부지런했을 것입니다. 역사나 철학 등 인문학적 지식에 허기를 느낀 분들도 참 많을 것 같습니다.
반면 오프라인에서 다양한 세대를 만나고 동네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는 서툴렀습니다. 도시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관계망의 결이 약해지고 있는 것은 비단 후배 세대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더 큰 외로움 속에 더 큰 동질감을 찾고 있지만 자주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생각이 많은 청춘기에 그런 어지러움을 맛보는 것은 더 큰 방황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기회는 보이고, 이야기는 들리는데, 만져지는 것은 없는 가상현실처럼 말입니다.여러분은 획일화된 교육의 폭력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제법 자신의 길을 가는 동료들을 많이 구경하였습니다. 게임 방송을 하며 돈을 버는 친구는 물론 아버지 가게를 물려받거나 해외로 이주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획일화된 폭력적 질서라면 그것만 따르면 그만인 것을, 한쪽에선 획일화를 논하고 한쪽에선 다양성을 요구하니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어쩌면 대다수는 이미 획일성에 베팅하였을 것입니다. 대기업을 들어가고 부모님이 창피해하지 않을, 주어진 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의탁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양성이라는 바람에 돛을 걸고 멀어져가는 지인이나 선배들을 보며 아찔함을 느낄 것입니다.
어느 길을 택하는지가 그 길 위를 얼마나 열심히 달리는지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설계를 결정하는 사람이 그 설계를 만들어내는 사람보다 더 큰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목격합니다.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자주 목격하고 맙니다. 그리고 주위에 선배들은 어쩐지 설계를 포기했다는 생각에, 그들의 조언이 더 헷갈리기만 합니다.

하지만 고성장시대가 전개되자 민간 기업의 회사원이 공무원보다 돈을 훨씬 더 벌기도 합니다. 대학을 나와 회사원이 된 것에서 대박의 기회를 찾은 것입니다. 삼시 세끼를 넘어 해외 출장도 가고 자동차도 사고 집도 사고, 어떤 미래를 상상했든 실제 현실은 더 크고 아름답게 변화해갔습니다. 대박이었습니다.
회사에 붙어서 충성을 맹세하면 새로운 부서가 생기고 새로운 자회사가 생기고 새로운 거래처가 열릴 때마다 더 큰 일을 할당받았습니다. 한두 번 찍히더라도 회사 안에 찬란한 미래가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한민국 대부분의 대기업이 구글 입사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대학 진학률이 6배 이상 올랐습니다. 대학의 가치는 1/6 토막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대기업의 가치도 떨어졌습니다. 고성장시대에 이뤄지던 기적들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지금의 구글이 십 년 전의 구글이 아니듯이 말입니다.이제 여러분에게는, 아버님 때의 신화와 전설이 귓전을 울리지만, 영광의 순간을 기억 못 하는 선배들의 얼굴이 묘한 이질감을 줍니다. '회사 때려쳐야지'를 밥 먹듯 중얼거리는 대리 과장 선배들을 보며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나의 희생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를 진지하게 자문하고 있을 것입니다.
고성장 시대에 올라탈 수 있던 기업 내 사다리는 모두 치워진 느낌입니다. 있다 한들 아무도 그것을 믿고 올라타지 않습니다. 같은 사다리 위에 밍기적 대는 엉덩이가 너무 많아 교통체증이 생깁니다. 사다리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30대 즈음에 느끼는 막연함 아닐까요? 내 갈 길을 갈 것인가, 간다면 길이 있긴 한 것인가, 그냥 있을까, 그냥 있으면 길이 있긴 한 것인가. 그때쯤 생각나는 것은 역시 이직입니다.이직에 대한 저의 생각은 첫째, 한번은 해보길 추천한다는 것입니다. 이직을 하면 아주 조금이라도 후회가 생길 것입니다. 더 악화되는 것도 많고, 완전히 똑같은 것도 많겠죠. 그러나 확실한 것은 '관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비교 대상이 있기에 자기 객관화가 가능해집니다. 기업들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 수 있는지를 알게 되죠.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쁘지 않습니다.평생 이직을 고민하며 제자리에 앉아 있는것보다 낫습니다. 답이 안 보인다면 한 번쯤 자리를 옮겨 내가 찾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재정의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옮겨보니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출발, 새로운 삶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이직한 사람들의 만족도가 대단히 높진 않더라도, 평균적으로는 제법 높은 편입니다. 무엇보다, 아기처럼 평가받다가, 경력직 프로로서 평가받게 될 때, 내 안의 프로가 눈을 뜨게 됩니다.

용기를 낼 필요도 있습니다. 대부분 즐거운 일을 하며 맨땅에 헤딩하면 더 행복하고 더 경제적으로 풍족한 미래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차피 기존 회사도 10년을 다닌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행복할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대신 힌트라면, 연봉은 깎되 직급은 지키거나 높이라는 것입니다. 더 많은 권한, 더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자리를 연봉을 양보해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사가 성장하면 그 암묵적 지분을 요구하면 됩니다. 일종의 투자인 셈이죠. 투자가 없으면 투자 수익도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 또 나에 대해 더 배워야만 행복해집니다.원문: Julius chun의 페이스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