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 준비했다. 오늘의 음주는 소주고, 안주는 소주의 역사다.
소주는 원래 달았다? 단맛 VS 쓴맛


동물만 바꾼 것이 아니다. 1965년 진로는 소주 생산방식을 바꿨다. ‘희석식 소주’를 선보인 것이다. 이는 마른오징어에서 물 짜듯이 값싼 재료에서 기계 증류탑을 이용해 알콜을 97~98%까지 뽑는 방식이다. 이 강한 알콜(주정)을 물에 타면서 희석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희석식 소주는 기존 소주에 비해 원가가 싸고 만들기가 쉬웠다. 문제는 알콜냄새와 쓴맛이 강했다. 할아버지는 말했을 거다. “이건 소주가 아니야!”
당시 소주의 끝판왕은 전라남도 목포에서 만드는 ‘삼학소주’였다. 단맛이 특징인 삼학소주의 시장점유율 60%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쓴맛 나는 소주를 만들었다가 인생의 쓴맛을 볼 수 있었던 진로는 어떻게 삼학을 뛰어넘을 수 있었을까?
정책적인 타이밍이 맞았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양곡관리법(쌀 수요 억제)’을 발표하며 쌀막걸리를 비롯 기존 소주 증류를 금지시킨다. 소주의 표준이 쌀을 안 써도 되는 희석식 소주가 된 것이다. 아무리 소주계의 강자 삼학소주라도 정책에 엇박자를 맞추면 밀주에 불과했다.
그렇게 1970년 12월 진로는 소주시장 1위를 차지한다. 그리고 한 번도 이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소주병은 어쩌다 초록색이 되었을까? 투명병 VS 초록병


그 주인공은 1994년 두산경월(이하 두산)에서 나온 ‘그린’소주다. 여러 소주들 사이에서 튀어보는 게 첫 번째 목적. 그리고 초록색 병으로 친환경 이미지까지 노리는 게 다음 목적이다. 색깔 하나 바꾼 게 뭐가 대수냐고? 효과는 놀라웠다. 새파랗게 젊은 그린은 한때 시장점유율 20%까지 차지하며 진로를 추격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다른 소주 회사들도 하나 둘 초록병을 사용했다. 진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린의 추격에 깨달음을 얻은 진로는 1998년 대대적인 리뉴얼을 감행한다. 병을 초록색으로 바꾸는 것은 물론, 제조과정에서 대나무 숯을 사용해서 자연에 가까운 소주를 만든다.
그 전설 아니 레전드의 이름, 바로 ‘참이슬’이 되겠다.전설의 투톱소주 작명가가 같은 사람? 참이슬 VS 처음처럼

처음처럼은 제품 출시 2주를 앞두고도 이름을 정하지 못했다. 소주는 이름 빨(?)이다. 취한 상태에서도 스타카토로 주문하려면 이름이 찰져야 한다. 두산은 결국 이름 잘 짓기로 소문난 전문가를 찾는다. 그가 추천한 소주 이름은 처음처럼이었다. 술을 마신 다음날에도 처음처럼 개운할 것 같은 이름이다. 좋다!

문제는 처음처럼이라는 이름이 성공회대학교 ‘신영복’ 교수의 작품 제목이라는 것이었다. 신영복 교수는 해당 이름 사용 여부는 허락했지만, 비용은 일절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1억원을 성공회대학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하는 것으로 처음처럼을 허락받았다. 소주병에 적혀있는 처음처럼의 글씨는 바로 신영복 교수가 직접 써준 것이다.
작명은 성공적이었다. 처음처럼을 추천했던 용한 작명가… 그는 누구일까? 바로 전 크로스포인트 사장이자, 현 국회의원인 ‘손혜원’ 의원이다. 참고로 손혜원 의원은 ‘참이슬’이라는 이름도 지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많이 마시는 두 술의 이름을 모두 붙이다니. 명예 소주의 전당에 등극시키고 싶다.
누가 물 좋은 소주냐? 대나무 숯 필터 VS 알칼리 환원수

소주는 재료가 단순한 술이다. 알콜, 즉 주정은 소주회사가 아닌 국가에서 지정한 업체가 만들어 제공한다. 때문에 소주마다 차별화를 할 수 있는 것은 1%도 안 되는 첨가물이었다. 처음처럼의 등장은 머리에 브릿지만 넣을 줄 알았던 복학생들 사이에서 삭발한 신입생이 나타난 격이다. 애주가들의 시선 집중. 두산은 처음처럼을 출시하고 소주 업계 6위에서 2위로 도약한다.
디펜딩 챔피언인 참이슬이 나설 때가 되었다. 참이슬은 대나무 숯을 이용해 불순물을 제거하는 깨끗한 소주임을 강조해왔다. 처음처럼이라… 오랜만에 상대할만한 도전자가 나타났군.
대결이다 포켓몬…아니 소주 모델! 단아함 VS 섹시

도전자인 처음처럼은 도발적이다. 처음처럼이 두산에서 롯데로 주인이 바뀌면서 광고모델로 이효리를 내세운 것이다. 당시 이효리는 뭐든 저스트 텐 미닛인 대중문화의 치트키아닌가. 애주가들은 술병 라벨에 붙은 이효리 사진을 잔 밑에 붙여 ‘효리주’라는 것을 유행시켰다. 이후 처음처럼은 도시적인 이미지의 모델을 기용했다.
참이슬과 처음처럼을 비롯해 대부분 소주 광고는 2030대 여성 연예인을 기용한다. 소주의 소비자가 2030대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다른 움직임이 벌어졌다. 바로 김건모다. 방송에서 줄곧 소주에 대한 애정을 펼쳤던 김건모는 결국 대선소주의 모델을 맡았다. 다양한 세대가 소주를 마시는 이때에 ‘진정한 애주가’를 모델로 내세우는 것은 의미 있는 변화가 아닐까(라고 쓰고 이력서를 들이밀어 봅니다. 저도 참 잘 마시는데요).
순한 소주의 독한 전쟁들, 저도수 VS 저도수

여기에 처음처럼이 기름을 부었다. “20도짜리 부드러운 소주가 나왔습니다 여러분!”이라는 외침에 소주의 마지노선은 20도가 되었다. 이에 참이슬은 19.8도를 출시하며 마지노선을 파괴한다. 거기에 처음처럼이 19.5도로 응수하고… 지금은 참이슬과 처음처럼 모두 17도 초반이다. 도수가 약해진 만큼 소주를 많이 마시니 매출도 많이 좋아졌다고.
소주 도수는 어디까지 내려갈까? 전문가는 15도가 소주의 마지노선이라고 예측한다. 그 이하면 소주 특유의 알콜향이 사라지고 물의 느낌이 강해진다. 이를 숨기려면 여러 첨가물을 넣거나, 아예 과일소주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미 지역 소주들은 15도짜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기차는 멈출 줄 모른다. 우리는 조만간 소주 맛 생수(?)의 출현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기쁠 때나 힘들 때 소주 한 잔이 주는 힘
‘취한다’는 것은 사실 굉장한 사치다. 시간도 투자해야 하고, 건강도 받쳐줘야 한다. 무엇보다 취할 만큼 술을 살 돈이 있어야 한다. 술은 원래 비싼 것이다. 하지만 소주는 부담 없는 가격으로 노동자의 저녁을 위로해줬다. “소주 한 잔 하고 털어내자” 이 말 덕분에 할아버지, 아버지를 비롯해 한국사회 전체가 힘을 낸 시기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술은 취하려고 마시기보다, 즐기고 싶어 마신다. 만약 소주회사가 하나뿐이었다면 바뀐 시대에 적응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참이슬과 처음처럼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소주의 맛과 품질을 바꾸고 있다. 그렇게 가장 한국적인 술의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야 앞으로 마실 날이 많이 남았으니까, 더 맛있어지길 기대하는 수밖에.
원문: 마시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