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방학, 마을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맞은편 책상 위에 놓인 영어단어학습서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영단어를 쉽게 암기할 수 있는 비법을 담은 유명한 책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주인의 허락을 받고 책장을 넘겨봤습니다. 그때도 이 책이 문제가 있다 싶어서 언제 이런 내용을 글로 정리해보려 했는데, 마침 오늘 우리 반 학부모님께서 같은 저자가 쓴 아동용 학습서가 어떤지 내게 조언을 구해오시기에 이 글을 쓰게 됩니다.

어른은 몰라도 어린아이에게 그런 고차원적인 격조를 강조할 필요가 있나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 에디슨, 파브르는 어릴 때부터 진지한 탐구정신을 품었기 때문에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과학 공부할 때는 과학자가 되고, 수학 공부할 때는 수학자, 국어나 영어 공부할 때는 시인이 되고 문학가가 돼야 합니다.
저는 영어를 잘한다고 말은 못 하지만, 어휘력만큼은 남들만큼 됩니다. 구체적으로 영어사전 없이 인문학 원서를 독파해내는 수준입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이런 방법은 단시간 내에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멀리 볼 때 독이 됩니다. 특히 어린 학습자에게 해롭습니다. 공부의 멋에 대한 희열이 뒷받침되지 않고 오직 ‘기능성’만 강조하는 이런 공부법은 아이들 정서를 불구화하고 사고를 왜소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몇 가지 면에서 의문을 품게 됩니다.
- 매직(을)칼(로 변하게 하는 마술...): (군대 미용실에서 머리)털이 (빡빡) 밀리(다)
이런 것들은 이와 관련된 문화적 경험이 전무한 아이들에게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매직은 우리 어릴 때 ‘매직’이었지 요즘은 ‘보드마카(board marker)’라 일컫습니다. 그리고 군대 근처에도 안 가본 아이들이 군인의 “머리털이 밀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지? 또 군대 이발소에서 머리 깎는 군인이 저렇게 울상 지을 일도 없거늘, 말하자면 이것은 영어단어 공부와 무관하게 잘못되거나 비합리적인 인간 삶의 단면을 ‘학습’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도박판에서 돈 따는 요령 따위를 학습하는 게 아니라면, 학생들이 공부하는 내용은 그 자체로 진-선-미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도덕성이나 지성의 품격은 내팽개치고 오직 말초 감각에 의존하며 ‘기억시키기’에만 몰입하게 하는 것이 어찌 교육적일 수 있을까요?
교육은 목적과 방법, 과정과 결과, 지성과 인성이 조화롭게 교육적이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이렇게 조잡한 방법으로 단어 공부를 하다 보면, 학습자는 필연적으로 ‘도대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 겁니다. 자신이 노름판이 아닌 책상에 앉아 있는 학습자라는 자각이 들 때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똑똑하고 지적인 학습자일수록 그런 생각이 빨리 찾아 들 것입니다. 만약 회의가 안 든다면 그 자체가 그 학습자의 지적 수준을 말해줍니다. 그 사람은 학창 시절 ‘공부의 멋’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빈곤한 지성의 소유자일 겁니다. 혹은 판단 능력이 미숙한 어린 학생들은 그럴 수 있겠죠? 이 학습서가 특히 아이들에게 해로운 이유라 하겠습니다.
원문: 필인의 꼼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