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트밀oatmeal을 처음으로 접했던 건 <안네의 일기>에서였다.
8시 20분이 좀 지나면 위층의 문이 열리고 마룻바닥을 가볍게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의 오트밀이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깊은 접시에 오트밀을 담아서 내 방으로 돌아온다.
안네 프랑크는 꽤 많은 끼니를 오트밀로 때운다. 작중에 묘사된 건 거의 '(먹을 게 없어 너무 싫지만 이걸로라도)때우는' 느낌의 서술이지만, 은신처라는 배경과 안네 프랑크의 아우라에 힘입어 그 생소한 음식도 꽤 로맨틱하게 와닿곤 했다. 숨겨진 은신처 바닥에 놓여 있는 텅 빈 음식 그릇.


그래서 며칠 전 룸메이트가 옆구리 한쪽에 끼고 온 큼지막한 퀘이커 오트밀을 보고 착잡하고 심난한 기분이 되었던 것이다. 자기 돈 주고 산 건 아니고, 모임에서 만나는 친구가 호기심에 샀는데 상술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모임에 버리고 갔으며 룸메이트는 역시 호기심에 주워 온 것이다. 사이즈는 또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 집에 당나귀는 없으니 사람 두 명이 저 큰 걸 먹어 해치워야 하는데 못 먹는다면 필요한 쓰레기봉투 크기만 20리터다. 바짝 건조해 있으니 보관은 용이하겠다.
만약 한국에서 코로나19 대비 사재기 바람이 불었다면 난 마트에 안 가도 됐을 것이다. 저 오트밀을 다 먹어 치우고 나면 전염병이 사라져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한참을 심난한 상념에 빠져 오트밀 포장재에 그려진 아저씨와 눈싸움하고 있었다.

오버나이트 오트밀, 그 오묘한 세계
나는 사실 오트밀 이 친구와 구면이다. 첫 직장에서 점심 대용으로 자주 먹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속이 부대꼈고 입맛이 없어 맛있는 걸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른 선택지였다.
머그컵에 오트밀을 몇 숟가락 넣고 우유를 부어 전자렌지에 몇 분 돌리면 포실포실 따끈한 것만 유일한 미덕인 죽이 완성되었고, 거기에 땅콩버터 한 스푼 넣어서 먹었다.
그건 뭐랄까, 반려당한 첫 보고서의 맛과 비슷한 것이다. 일단 두 개 다 종이 맛이 난다는 공통점이 있고, 퇴사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점이 특히 비슷한.

네이버에 '오트밀'을 검색해서 나온 첫 번째 레시피가 오버나이트 오트밀이었다. 반신반의하며 요거트, 오트밀, 우유를 넣어 하룻밤 불려두었다. 우유를 꽤 많이 찰랑찰랑 부어 두었음에도, 다음날 오트밀은 우유를 꽉 채울 만큼 불어나 있었다. 전자렌지에 돌리는 것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부피였다. 역시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한 입 먹었다.

너무 신기하고 맛이 좋아 나도 모르게 계속 먹다 보면 반 그릇 조금 넘어서 포만감이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점까지 너무 완벽한 한 그릇이다. 와, 이렇게 맛있을 거면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포장재 겉면에 이렇게 써 둬야 한다.
당신이 오트밀을 어떻게 먹든 자유지만 객관적으로는 하룻밤 불려서 먹는 게 좋을 겁니다.
이랬으면 내 첫 직장에서의 점심시간이 10% 쫌 즐거워졌을 수도 있는데. (그럴 리 없다)
사실 오트밀은 영양성분 면에 있어서는 미움받을 구석이 하나도 없다. 일단 10대 슈퍼푸드 중 하나다. 자세하게는 다음과 같다.
- 식이섬유가 풍부해 포만감이 높아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다.
- 그 외에도 높은 단백질 함량, 미네랄, 각종 비타민 등을 함유하고 있다.
- GI지수가 낮고 베타글루칸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혈당 조절에 용이하기 때문에 당뇨에 좋다.
- 칼륨 함량이 높아 동맥경화 예방, 심장병 예방, 신장병 등을 예방한다.
한 달 정도 샐러드, 오트밀, 군고구마, 채소를 곁들인 식사를 물릴 때마다 돌려가며 했다. 덕분에 주말마다 즐거운 음주 시간을 가지면서도 2.5kg를 감량할 수 있었다. 나는 이중 오트밀이 한 1/3 정도 기여도가 있다고 믿는다. 맛있어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거든.
맛있는 다이어트식이라는 건 기적의 다른 말이다. 인생에는 그런 소박한 기적들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좋을 수밖에 없다. 오트밀 최고.
이렇게 먹었습니다

- 요거트를 병 바닥에 2스푼 듬뿍 담는다. 난 두유 요거트를 넣었다. 두유로도 요거트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최근에 알았는데, 고소한 맛과 풍미가 더해지기 때문에 내 입맛에는 이쪽이 더 좋다. 우유 소비를 줄이고 있어서 더 반갑기도 하다.
- 오트밀 세 숟가락을 넣는다. 바짝 마른 오트밀의 바삭바삭 소리가 듣기 좋다.
- 다시 요거트 2숟가락을 얹고, 그 위에 찰랑찰랑하게 우유나 두유를 붓는다. 아몬드 브리즈도 부어봤는데 별로였다. 비싸기만 하고.
- 인정사정 없이 섞는다. 요거트와 우유와 섞여야 오트밀이 더 잘 불기 때문이다.
- 다음날 오트밀이 통통하게 불어 있으면 피넛버터나 잼, 생과일, 과일청 등을 자유롭게 올린다. 씨리얼이나 뮤즐리를 넣는 사람 있다. 잘 섞어서 먹는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