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원 시대'의 그림자... 산업계 전방위 압박 신호탄
달러 강세 장기화에 매출·원가·수요 3중 고통
정유·항공·철강 등 수입 비중 높은 산업 직격탄
소비·유통·중소기업까지 구조적 비용 압박 확산
기업 생존전략 다각화... 공급망·헤지·기술혁신 총동원
올해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 장기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한국 산업 전반이 다시 한 번 구조적 압력 속에 놓였다.
환율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환율은 기업의 사업계획, 투자 결정, 재무 건전성, 소비 흐름까지 촘촘하게 흔드는 ‘경제의 마디줄’이다. 현장에서 만난 기업들은 공통적으로 “한 치 앞을 보기 어려운 장기 불확실성”을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지목했다.
달러 대비 원화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은 소위 ‘수출엔 호재, 내수엔 악재’라는 단순 공식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2024년 한국 경제는 이 이분법을 넘어서 보다 복합적인 충격—비용 상승, 소비 위축, 정책 불확실성—을 동시 경험하고 있다.
이 글은 산업별 현실을 종합해 ‘고환율 시대 한국 산업이 숨 고르는 법(法)’을 짚어보고자 한다.

■비용의 시대 "정유‧항공‧철강, 세 업종에 드리운 이중·삼중의 그림자"
정유업계는 한국 경제의 환율 체감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업이다.
국내 정유사들은 연간 10억 배럴 이상의 원유 대부분을 달러로 수입한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환율이 10% 오르면 순이익이 1,544억 원 감소한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정유사들은 수출 비중이 높아 ‘자연 헤지’가 작동한다.
문제는 수출로 상쇄되지 않는 기업들, 특히 원료를 달러로 사서 국내에 판매해야 하는 철강·화학 업종이다.
철강업계는 올해 미국발 관세 압박까지 겹치며 말 그대로 ‘설상가상’이다. 철광석과 연료탄을 모두 달러로 수입하는 구조에서 환율 상승은 곧바로 원가 압력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글로벌 경기 둔화로 철강 가격을 올리기 어렵다는 점이 최악의 조합이다.
포스코가 환리스크 모니터링을 강화하며 ‘시나리오 경영’으로 대응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항공업계는 고환율의 직격탄을 가장 먼저 맞았다. 항공유, 리스료, 정비비 등 영업비의 상당 부분을 달러로 결제한다.
대한항공은 환율이 10원만 올라도 외화평가손실이 480억 원 증가한다. 여기에 환율 상승은 여행 심리를 위축시켜 항공 수요까지 갉아먹는다. 비용과 수요, 양쪽에서 압력이 동시에 들어오는 구조다.
이 와중에 해운업은 ‘희비가 엇갈린 업종’이다. 해상운임이 달러 기준이기 때문에 고환율 시기엔 운임을 원화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환차익이 발생한다. 다만 유가 상승이 동반될 경우 효과는 상당 부분 상쇄된다.
■소비의 변화 "면세점·패션·대형마트로 번지는 ‘강달러의 그늘’"
고환율은 한국 면세점을 가장 먼저 흔들었다. 면세점의 장점은 ‘저렴함’인데, 지금은 그 메리트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일부 상품은 백화점보다 비싸지는 ‘가격 역전’ 현상까지 나타났다.
외국인의 소비 패턴도 ‘쇼핑 여행’에서 ‘경험·체험 여행’으로 바뀌며 면세점의 회복 탄력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 여파로 주요 면세점들은 희망퇴직을 단행했고, 일부 사업권을 반납하는 등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대형마트 역시 환율의 그늘을 피하지 못했다. 수입 식재료 가격 상승은 곧바로 소비자 가격 압력으로 이어진다.
이에 이마트·롯데마트·홈플러스는 냉동육 확보, 수입국 다변화, 장기 구매 계약 등으로 대응하며 ‘마트판 환율 헤지’를 시도하고 있다. 이 움직임은 단기 비용 관리뿐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도 맞물린 변화다.
패션업계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원단·부자재는 달러로 사고, 완제품은 해외로 수출하는 방식이 복합적으로 펼쳐져 있어 환율 영향이 단순히 ‘호재’ 또는 ‘악재’로 정의되지 않는다. 업계에서는 공급처 분산과 구매 시점 분리 전략을 통해 충격을 최소화하고 있으나, 고환율이 장기화된다면 비용 구조 전반을 다시 짜야 한다는 경고음이 이미 나오고 있다.
■산업별 대응을 넘어 국가 경제의 ‘체질을 묻는 질문’
K-뷰티 업계는 가장 상반된 체감을 보인다. 원료 수입에는 타격이지만 수출 증가로 인한 외화 수입 증대는 이익으로 연결된다. K-뷰티가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상황에서 고환율은 단기적으로 수출 경쟁력을 높이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기업들은 장기적으로 원료 조달 리스크를 대비해야 하는 만큼 ‘구매처 다변화’와 ‘글로벌 사업 확장’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상황은 더 취약하다. 원자재 수입 비중이 높은 중소 제조업은 비용 상승이 영업이익을 거의 즉각적으로 잠식한다.
중기부가 자금지원과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지만, 환율은 정책적으로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한계가 명확하다. 결국 스마트팩토리 고도화와 기술혁신 같은 구조적 체질 개선이 장기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환율은 위기이자 기회… 그러나 관리 없는 기회는 없다”
현장 취재를 하고 피부로 느끼는 필자의 관점은 ‘고환율은 누구에게나 절대적 악재냐’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고환율은 어떤 기업에게는 수출 경쟁력, 외화 수익 증가, 재무 지표 개선 등 기회가 된다. 문제는 그 기회를 지속가능한 성과로 바꿀 능력과 체력이 기업마다 극명하게 다르다는 데 있다.
올해 산업계가 겪는 어려움은 단순히 환율 때문이 아닌 관리없는 기회는 없듯이 위기이자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즉, ▲원자재 해외 의존도 ▲달러 결제 비중 ▲산업별 고정비 구조 ▲글로벌 공급망 변화의 이 네 가지가 서로 엮여 ‘복합 충격’을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질문은 단순히 “환율이 언제 내려오나?”가 아니라 “환율 변동성에 견딜 수 있는 산업 구조인가?”가 되어야 한다.
각 산업의 대응은 이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정유·철강은 자연 헤지 확대와 시나리오 기반 경영, 항공은 비용 구조 재편과 헤지 전략, 유통·패션·소비재는 공급망 다변화와 재고 전략 강화, 중소기업은 기술 혁신과 자동화로 체질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환율은 거시경제의 결과이자 전조다. 위기 역시 일시적 충격을 넘어 산업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지금 한국 산업은 바로 그 질문인 “우리는 변동성 시대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답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는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