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청소년 자살, 더는 개인의 비극으로 치부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 자살은 이제 통계 속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집단적 위기가 되었다.

청소년의 사망 원인 1위가 여전히 자살이라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학생 자살이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현실은 그동안 우리가 놓쳐온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준다.

이 비극을 단순히 한 개인이나 한 가정의 문제로 설명하기에는, 그 배경에는 너무나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압박이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청소년이 버티고 있는 것은 미래의 희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낙오하지 않기 위해서다.

학업 경쟁이 극심한 현실에서 아이들은 성적이 그대로 인생의 등급이 되는 사회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성적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대학·취업·사회적 평가가 결국 점수와 순위에 의해 결정되는 모순이 아이들을 질식시키고 있다. 이런 구조를 고치지 않는다면 청소년 자살은 정책이나 캠페인 몇 개로 해결될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정신건강 서비스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도 많은 가정에서는 상담이나 치료를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기록이 남아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하지만 OECD 최악 수준의 자살률을 가진 나라에서 정신건강 서비스는 선택이 아니라 기본권이다.

학교에는 전문 상담 인력을 충분히 배치해야 하고, 지역 보건소·병원·청소년센터는 더 촘촘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특히 저소득층·농어촌·한부모 가정 등 취약한 환경에 있는 아이들에게 더 빠르고 쉽게 닿을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위험 신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결국 우리라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반드시 신호를 보낸다. 말투가 바뀌고, 표정이 사라지고, 친구와 거리를 두고, SNS에 불안한 문장을 남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사춘기나 일시적인 스트레스로 치부하고 지나칠 때가 많다. 청소년 자살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사회적 관심과 관계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친구, 교사, 부모, 지역사회 모두 조금씩만 더 민감해진다면, 수많은 아이가 구조될 수 있다.

정부는 2027년까지 자살률을 30%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중요한 목표지만, 목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목표가 ‘현장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현실화되는 일이다.

위기 학생이 발견되었을 때 즉시 전문가에게 연결되는 체계, 학교와 가정과 지역기관이 하나의 네트워크처럼 움직이는 시스템, 플랫폼에서 자살 위험 콘텐츠가 무분별하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감시 장치까지 모두 구체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청소년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선언이 아니라 실행이다.

결국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은 “왜 그 아이는 그런 선택을 했나”가 아니라 “왜 그 아이는 도움을 받을 수 없었나”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개인도, 가정도 아니다. 비난해야 할 것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무관심의 구조’이며, 바꿔야 할 것 역시 그 구조다.

청소년 자살 문제는 한 세대의 상처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신호다. 아이들이 더는 절망의 벼랑 끝에 서지 않도록, 어른들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저작권자 © PPSS ㅍㅍㅅㅅ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